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6)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6)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8.21 16:1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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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6)

▶고려 제31대 공민왕(재위:1351~1374·23년)은 부친 충숙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배우자는 노국대장공주이며 아들은 우왕(재위:1374∼1388)이다. 집권 이후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어느 날 공민왕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힘 센 장사가 시퍼런 칼을 들고 공민왕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다. 꿈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고, 시퍼런 칼을 든 장사만이 자기를 따라오고 있었다. 장사가 공민왕을 칼로 치려고 하자 공민왕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져 슬며시 눈을 떠보니 장사의 머리는 바가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 있고, 온 몸에서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장삼을 입은 스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꿈에서 깨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원명이라는 신하가 왕에게 아뢰었다 .“마마! 덕망과 슬기가 아주 출중한 신돈(辛旽:?~1371)이라는 승려가 있는데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한 번 만나 설법을 들어보시면 심신이 평안해지실 것입니다.” 며칠 뒤 김원명이 신돈이라는 승려를 데리고 왔는데, 꿈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바로 그 스님이었다. “내가 생시에는 스님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꿈속에서 뵌 적이 있다오.” 그러면서 공민왕은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마마 전생에 인연이 깊지 않았나? 생각되옵니다.” 왕은 이런 인연으로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여 1371년(공민왕 20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을 유배시킨 후 처형하였다.

공민왕은 1374년 신하였던 홍륜과 최만생에 의하여 시해(弑害)되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공민왕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내가 내일 창릉에 배알하고 주정(酒酊)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홍륜과 최만생을 비롯하여 변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그들의 삼족 또한 멸족되었다.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고려사’는 공민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시호(諡號)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며 능호(陵號)는 현릉(玄陵)이다. 현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릉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결실을 거뒀다. 공민왕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적혀있는 복장유물이 발견된 충남 청양 장곡사(靑陽 長谷寺)의 불상과 유물 18점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3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2년 6월 23일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공민왕은 군주로서의 냉정함이 부족한 인물이었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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