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9)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9)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9.11 15:5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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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9)

▶조선조 제3대 임금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1367~1422·55세, 재위:1400~1418·18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號牌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태종이 운명하던 1422년 봄에는 유난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가 위기에 빠졌다. 이에 나라를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마땅히 옥황상제님께 빌어 한바탕 비를 내리게 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을 기쁘게 하겠다. 세자는 몸이 허하니 상중(喪中)이라도 꼭 고기를 먹도록 해라.” 유언 중에 나오는 세자는 세종대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종대왕은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아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다. 초혼(招魂)을 하자마자 큰 비가 내렸다. 이후 태종의 기일(忌日)인 음력 5월 초 열흘날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곤 했는데, 백성들은 이를 감사히 여겨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 자식 사랑이 유난했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무덤은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에 있는 헌릉(獻陵)인데 사적 194호,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조 제4대 임금 세종(世宗:1397~1450·53세, 재위:1418~1450·32년)은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廢世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과학 기술·예술·문화·국방 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읽지 못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특히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渾天儀)·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측우기(測雨器)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최윤덕·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정치면에서는 황희·맹사성·윤회·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생을 마감할 때 “왜인과 야인을 대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평안에 빠져 있다가 혹 해이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려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약 140년 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왜인에게 나라를 점령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무덤은 영릉(英陵)으로 천하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는 뜻의 ‘영릉가백년’ ‘조선가백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명당 중 명당으로 꼽힌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손들은 만 원 권 지폐에 존영을 새겨 기념하고 있다.

▶조선 제5대 임금 문종(文宗)(1414~1452·38세, 재위:1450~1452 ‧ 2년)은 세종의 적장자(嫡長子)로 등극하였으나 그 자리를 2년밖에 지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면서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에게 “아들을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우의정 역시 수양대군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들은 단종이다. 단종 역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교살(絞殺)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유언이 헛말이 아니었다.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顯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에 있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태종과 세종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유언에서 나라와 국민을 걱정했지만 문종은 아들을 걱정하고 생을 마감하는 차이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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