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0)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0)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9.18 15:5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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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0)

▶2200여 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131대) 콘스탄티노스 11세(1405~1453·48세, 재위:1449~1453·4년)는 10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한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온 힘을 다해 두 달간이나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 당시 오스만 측에서는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황제 및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부했다.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나뿐 아니라 여기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나 또한 도시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저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나는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날 밤인 5월 28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그리스인 지휘관에게 고했던 연설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도시는 함락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내 시체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라는 유언을 남기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을 수의(壽衣) 삼아 밀려오는 오스만에게 돌격하여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2200여 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유해(遺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오스만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대리석상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오스만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민족 영웅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다. 2009년 스카이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28위에 선정될 정도. 이는 역대 로마 황제 중 최고 순위다. 인간의 목숨을 걸 만한 네 가지지 명분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조선 6대 임금 단종(端宗:1441~1457·16세, 재위:1452~1455·4년)은 본관 전주, 휘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왕의 자리를 양위한 2년 후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교살(絞殺)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폐위되었을 때 의금부도사였던 왕방연(王邦淵:생몰년 미상)이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의 압송 책임을 맡았다. 어린 임금을 유배지인 두메산골에 두고 돌아오면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읊었다. 천 만 리 머나먼 곳(영월)에다 고운 임(단종)을 이별하고(돌아와)/나의 슬픈 마음을 붙일 데가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흘러가는) 저 냇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을 흐르는구나. 가슴 아픈 마음을 둘 곳 없어 하는 슬픈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듯 단종에 대한 애틋함으로 괴로워하는 그에게 또 한 번 무자비한 임무가 주어진다. ‘단종을 사사(賜死)하라.’ 감히 왕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청령포에 도착하였지만 “무슨 일로 왔느냐?”는 단종의 하문에 차마 아뢰지 못하고 마당에 엎드려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이에 수행하였던 나장(羅將)이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으니 속히 집행할 것을 재촉하였으나 그는 계속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이 일을 자청하는 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단종을 모시던 공생(貢生)이었다. 그자는 활시위에 긴 끈을 이어 단종의 목에 걸고 뒷문에서 잡아당겨 단번에 목을 졸라 죽였다. “무슨 일로 왔느냐?”가 단종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1457년 11월 7일, 단종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단종을 사사(賜死)하라’는 임무를 하명받은 의금부도사도 감히 집행을 못하던 상황에서, 평소 모시던 주군(主君)을 공생이 솔선하여 자기 손으로 교살하였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단종이 처형되었던 500년 전의 시대적 상황이 오늘날, 이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개인의 권력과 영달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는 공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구나! 청령포에서 단종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관음송(觀音松)이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는 소나무를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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