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2)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09 15:2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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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2)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조선 제7대 임금 세조(1417~1468·51세, 재위:1455~1468·13년)에 대하여 2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휘는 유(瑈), 본관은 전주, 자는 수지(粹之)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문종의 친남동생이자 안평대군·금성대군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즉위 전 군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다. 수양대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불의의 피를 뿌리는 가시밭길이었다. 왕자 시절 말타기와 활쏘기, 사냥을 즐겨 했다. 당시는 유교사회였는데 그는 무속과 불교를 신봉하였다.

수양대군이 하루는 시중 민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한자로 쓰여진 글자판을 놓고 글자로 점을 치는 점쟁이를 만났다. 수양대군이 밭 전(田) 자를 고르자 점쟁이가 “허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왕이 많은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풀이했다. 놀란 수양대군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본 즉, 밭 전자는 임금 왕(王)자 두개를 수평과 수직으로 겹쳐놓은 글자라는 것이다. 얼마 후 수양대군은 다시 점쟁이를 찾아 똑같이 밭 전 자를 골랐다. 그러자 점쟁이가 “첩첩산중”이라고 풀이하였다. 다시 궁금증이 생긴 수양대군이 점쟁이에게 이유를 묻자 뫼 산(山)을 사방으로 겹쳐놓은 것과 같은 글자이므로 산중의 산, 첩첩산중이라는 것이다.

점쟁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의심한 수양대군은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요량으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시 점쟁이를 찾아가 칼끝으로 다시 밭 전(田) 자를 골랐다. 위협을 느낀 점쟁이는 말없이 밭 전 자의 좌우를 지웠다. 밭 전(田)자에서 좌우를 없애니 임금 왕(王)자가 되었다. 임금이 된다는 신호였다. 이에 크게 깨달은 수양대군은 철저하게 왕위에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을 했는데도 시중에는 수양대군이 야심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권람과 한명회를 필두로 신숙주·정창손·정인지·김질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은밀히 세력을 확대해가면서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36세 때인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얻은 뒤 단종 대신 섭정하며 조정을 장악하였다. 철권 통치를 함에도 1453년 10월 25일 함길도 종성에서 ‘이징옥의 난’으로 정국이 크게 흔들리게 되자 충복인 신숙주와 한명회를 의심하여 옥에 가두는 내홍(內訌)에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알 수 없는 병으로 20세의 나이에 급사하는 등 불행은 잇달았다. 조정을 장악한 2년이 경과한 38세 때인 1455년(단종 3년) 단종으로부터 명목상 선위의 형식을 빌어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는 생육신과 사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 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는 성삼문·박팽년·유성원·하위지·이개·김문기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유응부, 성승 무인들은 연회 때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 중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밀고하게 되어 사육신의 단종 복위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낸 후 죽였다. 세조는 사육신을 직접 국문하였다. 하위지에게만은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다른 사육신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 것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제안하였지만 하위지는 회유를 뿌리쳤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하였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形: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다른 동료들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이때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珀)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라고 하직한 뒤 죽음을 맞이하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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