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가을의 초입에서
진주성-가을의 초입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17 15: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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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가을의 초입에서

지난여름은 해만 떴다 하면 불볕더위가 들볶아댔고, 밤이면 열대야로 사람 못살게 삶아댔으며 비만 왔다 하면 하늘이 무너질 듯이 물 폭탄을 퍼부으며 분탕질을 해댔다. 그렇게 애를 먹이더니 흔적 없이 물러갔다. 성질머리 한번 고약한 여름이었다. 저렇게 껍죽거리는 것도 한철이겠지 하던 하늘이, 뒷설거지하듯 말끔히 걷어내고 마음껏 높푸르다.

짙푸르던 들녘의 빛깔이 노랗게 물이 든다. 후텁지근했던 바람도 산들거린다. 사방에서 가을 축제의 알림장이 날새기가 무섭게 날아든다. 전국이 축제로 들썩거린다. 마음이 들뜨니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이때쯤이면 어딘가의 언덕배기에는 들국화도 피었겠다.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그리움을 간질인다. 억새도 길마중을 나와서 백발을 반짝이며 세월 기다리지 말라고 넌지시 부추긴다.

가을이 소리 없이 깊어간다. 잊었던 옛일들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어제의 고달픔이 오늘의 안식이 되고, 탈 없이 지나간 날들이 오늘의 행복임을 깨닫게 한다. 높아진 하늘이 빛깔 곱게 산야를 물들이고 풍요의 뜨락을 끝없이 펼쳤다. 일상에 부대끼며 찌든 땀내의 저편에도, 향기로운 외로움을 안고 들국화가 피어있고, 산모롱이 돌아가면 코스모스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섰다. 잊었던 사람들이 보고 싶어진다.

덜 가져서 홀가분한 사람, 넘쳐서 버거운 사람, 고단하여 등이 휜 사람, 서러워서 오지랖이 젖은 사람, 많고 많은 사람 속에, 끝끝내 속내 한번 내보이지 못하고 돌아선 사람 하며,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떠난 사람도 보고 싶다. 일상을 보듬고 얽히고설킨 매듭, 이제는 다 풀어야 할 계절 가을이다. 까닭 없이 맺힌 고도 풀어내고, 있는 속, 없는 속 다 비우고 생으로 앓던 속앓이도 털어내야겠다. 햇볕이 너무 좋다. 식어가는 가슴을 데워야 할 그리움의 계절이다. 돌아앉은 마음도 불러오고 멀어져 간 옛정도 되살려야겠다.

모르는 사람도 그리워지는 가을, 옆에 앉은 사람이 있어서 좋고, 마주 보는 사람들이 있어 더 좋다. 고운 듯 미워져 멀어졌던 사람이 더 보고 싶다. 가을이 그리움으로 물 들고 있다. 이제는 잊어도 좋을 지난날을 뒤로하고 코스모스 하늘하늘 피어있는 길, 기다림의 들국화가 향기로운 길, 그리움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길, 끝 모르는 가을 길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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