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내가 나를 추월할 때가 있다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내가 나를 추월할 때가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22 15:21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우담/시인
박우담/시인-내가 나를 추월할 때가 있다

1
담쟁이덩굴이 담을 벗어나
허공으로 달아난다
추월당한 담은
이미 담이 아니다

2
정신없이 길을 달리다 보면
길을 추월할 때가 있다
길이 헉헉거리며
나를 따라올 때가 있다

3
가끔은 내가 나를
추월할 때가 있다
뒤처진 내가
안 보일 때가 있다

(김남호의 ‘추월’)

오늘 소개할 작품은 김남호 시인의 ‘추월’이다. 시집 ‘말하자면 길지만’에 수록된 작품이다. 김남호 시인은 하동 출생으로 현재 박경리문학관 관장직을 맡고 있다. 대아고등학교와 경상대학교 수학교육과를 졸업한 김 시인은 좋은 시도 발표하고 있지만 이미 평론집도 두 권 출간했다. 이처럼 장르를 넘나들면서 활동하고 있다.

며칠 전 형제봉 아래 귀촌하여 습작하고 있는 지인이 등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하러 평사리를 지나갔다. 회남재 오르는 길에 문득 박경리 선생의 시‘진주 사내 또개’가 생각났다. 짧게 소개하면 “그는 새가 되었을까. 앵무새가 되었을까// 그는 꽃이 되었을까. 달맞이꽃이 되었을까”로 끝나는 작품이다. 작가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작품은 남아 회자되고 있다.

김남호의 시 ‘추월’은 이러하다. ‘길’이 있는 곳엔 ‘추월’은 있기 마련이다. 경쟁적인 사회에서 직장인들은 일자리 유지와 승진을 위해 많은 압박을 받는다. 현대인은 눈만 뜨면 경쟁이고, ‘길’ 나서면 투쟁이다. 길 가다 보면 안다.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가는 것처럼 무의식이 나를 끌고 간다. 내 속의 타자가 나를 조정하고 있는 걸.

“담쟁이덩굴이 담을 벗어나/ 허공으로 달아난다” 결국 중력을 거부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거나 말라 죽는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주 나약한 존재다. 경쟁 속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은 ‘길’이 보이질 않아 고민한다. 늘 그대로인 보폭과 그대로인 근심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무의식을 ‘추월’하지 못한다. “추월당한 담은/ 이미 담이 아니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정체성은 어떤 존재의 가치와 목표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체성을 잃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 ‘담’은 담다워야 하고, ‘덩굴’은 덩굴 고유의 힘을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담도 길인 셈이다. 김남호의 ‘추월’에서 ‘담’은 무엇을 상징할까. 유토피아의 ‘길’이거나 디스토피아의 ‘길’이라 생각된다. 화자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문학이나 영화 그리고 게임에서 다뤄지는 디스토피아는 아닐까. 문학은 현대인의 비밀과 은밀성을 나타낸다. 숨겨진 사실을 발견하거나 탐험하는 동안 긴장감과 호기심을 자아낼 수 있어 반전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라진 유토피아와 도래할 유토피아를 동시에 꿈꾼다.

“정신없이 길을 달리다 보면/ 길을 추월할 때가 있다” 문학은 현실화하기 전에 재난의 길을 먼저 읽는다. 문학은 유토피아의 언어를 구축한다. 현재의 디스토피아는 더 큰 유토피아 욕망을 생산한다. “가끔은 내가 나를/ 추월할 때가 있다.” 이상을 찾아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일교차는 커지고 그림자가 길어진다. “길이 헉헉거리며/ 나를 따라올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고 늘 예측은 빗나간다. 담쟁이덩굴이 ‘담’을 벗어난 ‘담’들은 땅을 지나 바로 죽음이라는 곳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뒤처진 내가/ 안 보일 때가 있다” 인생이란 막의 순서는 정해져 있고, ‘길’의 끝은 피할 수 없다. 새장 속의 새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길에 갇혀 있다. 흰색에서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검정으로 간혹 무지갯빛으로 길은 다가온다. 우리의 삶이란 앞서거나 뒤서는 서글픈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숨기고 싶은 상처를 안고 스스로 위축되거나 비통해하지 말자. 내가 안 보일 때 있지만, 말하자면 발 디디면 길이 된다. 길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먹이사슬에 따라 먹고 먹히고 생존의 균형을 맞춰간다. 길은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치열한 경쟁터다. 김남호 시인은 박경리문학관에서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시인의 가치 있는 작업과 실험이 기대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