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5)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30 15:4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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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5)

▶‘폭군의 대명사’로 기록을 남긴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30세, 재위:1494~1506·12년):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100년간 태평성대를 누렸지만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왕들에 비해 학식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시와 음악 등 예술 쪽에도 재능이 있었다.

즉위 초에는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다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었음을 알고 나서 폭군으로 돌변하게 된다. 수많은 여인을 품에 안았지만 그가 사랑한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본부인 신씨 뿐이었다. 중종반정으로 집권 12년 만에 강화도로 쫓겨나 1506년 30세의 청춘을 뒤로 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살아생전 사슴 꼬리와 혀를 좋아했다고 하니 민초들의 고충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12년 집권기간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신씨는 “학정을 그만하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내치지도 않았다. 장녹수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과의 난잡한 생활 속에서도 “황금에 중전의 덕을 기려 새기라”고 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부인 신 씨가 보고 싶소”였다.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방학동)로에 있는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 지정되었다.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두 사람의 폐주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선원계보’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에 버금가는 폭정을 행사했던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복형인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자 반정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11대 국왕 중종(1488~1544·56세, 재위:1506~1544·38년):재위 기간 중 훈구 공신과 사림의 갈등으로 정쟁이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화와 옥사·투서·무고 등의 궁중 암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막강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박원종·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하면서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그를 총애하였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도학적인 조광조를 점차 기피하고 불신하였다. 남곤·홍경주 등의 훈구세력은 홍경주의 딸이자 중종의 총희(寵姬)인 희빈(熙嬪)을 사주하여 궁궐 후원 나뭇잎에 꿀을 바른 붓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氏)가 왕(王)이 됨(爲)’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벌레가 나뭇잎 위를 기어 다니며 꿀을 바른 부분의 글자를 파먹자 ‘주초위왕’의 형상이 파인 나뭇잎을 들고 중종에게 호소하였다. 이 사건을 이유로 중종은 조광조를 실각시키고 많은 사림들을 사사(賜死)하였다. 동시에 그가 추진하던 개혁들도 폐지하였다.

1544년 11월 29일 56세 되던 해 중종은 세자(인종)에게 전위의 뜻을 밝히고,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신들이 따른 뒤에라야 내 노열(勞熱)이 덜해질 것 같다. 이러한 때에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재위 38년을 마감하고 승하하였다. 묘는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삼성동)에 있는데 정릉(靖陵)으로 임금 홀로 있는 쓸쓸한 단릉(單陵)이다. ‘중종실록’에서 사관은 중종과 중종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38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고 애석하다.’

지난 10월 26일 윤석열 대통령께서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4주기 추도식에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하여 “세계적인 복합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과 위업을 다시 새기고, 이를 발판으로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제가 취임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92개국 국가의 정상을 만나 경제협력을 논의했습니다만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뤄내신 압축성장를 모두 부러워하고 위대한 지도자의 결단에 경의를 표했다”며 “저는 이분들에게 ‘박 대통령을 공부하라, 그러면 귀국의 압축성장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통합이고 미래지향의 정치가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의 통 큰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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