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기러기 날아오면
진주성-기러기 날아오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31 15:17
  •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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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기러기 날아오면

황금빛으로 일렁이던 들녘이 휑하니 빈 허허벌판으로 바뀌었다. 콤바인이 들판 곳곳을 휘젓고 다니더니 며칠 사이에 가을 추수가 끝났다. 볏짚을 말아 하얗게 비닐로 감은 커다란 공 모양의 사일리지가 띄엄띄엄 빈 논을 지키고 있더니만 그마저도 어느새 거둬가고 어쩌다 눈에 띈다. 비탈 산의 감나무밭에도 감 수확이 끝나고 남겨진 이파리가 울긋불긋하게 단풍으로 물들었다. 산과 들이 고단했던 몸을 풀고 한숨을 돌린 듯 평화롭다.

먹장구름이 껍죽거리며 천둥이 으르릉거리던 하늘도 파랗게 높아졌고 흰 구름도 한가롭다. 쫓고 쫓기며 숨 가쁘게 내달리고 서로가 뒤엉켜서 뒤죽박죽이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안정을 찾은 듯 차분하다. 폭풍우에 시달린 작은 풀꽃도 씨앗을 익히려고 가을 햇볕에 살갑게 안긴다. 어수선했던 세상이 더없이 평화롭다.

숨돌릴 틈도 없어 돌아보지 못한 지난날을 이제야 가을 햇볕의 따사로움에 안겨 긴 한숨을 내쉰다. 산야가 품어내는 가을의 향기는 새금하고 감미롭다. 파란 하늘이 헝클어진 머릿속을 비워내고 가을 빛깔로 물들인다. 눈시울이 지그시 감긴다.

하고 많은 나날을 비바람에 시달리고 뙤약볕에 들볶이며 휘둘리고 부대끼던 지난여름이 늘어지게도 지루했는데 보내고 돌아본 세월은 순간이었다. 스쳐 가는 봄바람에 꿈에 본 듯 꽃은 지고, 계곡물에 발 담근 채 매미 소리 얼핏 듣고 먹구름 다가올 때 우산 챙긴 기억밖에 없는데 어느새 가을볕이 오지랖에 내려앉았다. 젖는 줄 모르게 젖은 마음도 볕 바르게 널어놓고 바람에 데인 상처도 덧나지 않게 다독여야겠다.

까닭 없는 서운함도 훨훨 털어내고 계산 없이 끌어안았던 온갖 잡동사니도 버려야 하는 가을, 비워낸 곳간이 따스한 온기로 그들먹하다. 손사래 쳤던 박절함이 이제야 미안하고 귓전으로 듣던 소리가 가슴에서 울려온다. 회한에 젖은 눈시울에 가을 햇볕이 무지개를 피운다. 껍죽거리느라 잊어버린 얼굴이 이제야 거울 속에서 내다보며 웃는다.

추강낙안(秋江落雁). 기러기가 돌아와 강변에 앉는다. 청둥오리도 함께 왔다. 옛정 못 잊어서 돌아오는 계절. 잊었던 기억도 챙겨야 하는 가을, 산야가 단풍으로 오색으로 물들었다. 남강에 큰고니가 날아오면 빈 들판에는 재두루미가 내려앉을 것이다. 부질없이 끓인 속 다 비워내고 잊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자리를 비워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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