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裸身으로 비탈에 서다
세상사는 이야기-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裸身으로 비탈에 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05 15:3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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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裸身으로 비탈에 서다

깊어가는 가을, 나는 요즘 날마다 나무들이 누렇게 단풍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애련함에 잠기다가도 그들의 위대함에 감탄한다. 누가 일러 단풍을 수분과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병색이라 했던가. 그것은 자기 완성이요 내일을 위한 희생의 미덕이다. 여름 내내 온갖 질고를 이기며 녹음과 그늘로 인간을 시원케 해주고 더러는 후대를 위하여 열매와 씨앗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내일의 새싹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며 정작 자신은 부토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태양이 서산을 넘어갈 때 마지막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들도 잔조의 빛을 단풍으로 아름답게 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단풍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며칠 전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를 찾았다. 그 휑한 비탈을 정령처럼 밝히는 나무가 있다. 가을 다 보내고 이맘때가 돼야 비로소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 있다. 나목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무. 겨울로 갈수록 수피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하는 나무. 누군가 “나무 중에 가장 수줍고 귀부인다운”이라고 노래했던 나무. 추위 속에서 더욱 맑아지고 인고와 침묵의 나무, ‘순백의 정령’ 자작나무다. 뽀얀 우윳빛 살결이 우아하다. 기품있고 정갈하다. 늦가을 산비탈에 하얀 잔가시로 촘촘하게 박혀있다. 맨살 종아리가 안쓰럽다. 가녀린 흰 목덜미가 애뜻하다.

자작나무 숲은 오붓하고 아늑하다. 정상 언저리 나무들은 ‘올 누드’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눈부시게 하얀 몸. 바람이 불면 우수수 몸을 떤다. 가까이서 스킨십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약 7만5000여 평에 4만의 그루가 빡빡하다. 자작나무 숲 위로 새파란 하늘이 덩그마니 걸려있다. 돌을 던지면 금방이라도 쨍그랑! 깨질 것 같다. 상큼한 자작나무 향기가 싱그럽다. 머릿속이 박하처럼 맑아진다. 바로 ‘자일리톨’ 향기다. 매끈한 자작나무 몸을 만져보면 단단하면서도 촉촉하다.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널찍하다. 멀리서 봐야 새뜻하다.

자작나무는 한반도에선 개마고원 쯤에나 자라는 추운 나라 수종이다. 언젠가 백두산 가는 길, 눈밭에서조차 환하게 빛나던 그 숲도 자작나무였다. 북방 사람들은 자작나무로 집을 짓고 불을 땠다. 죽은 이를 자작나무 껍질로 감싸 떠나 보냈다. 자작나무는 겉은 희지만 속은 기름을 잔뜩 머금어 검다. 기름기 때문에 ‘자작자작’ 소리 내며 잘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의 ‘백화’)

눈이 시리도록 하얀 줄기들이 얇은 종잇장 같은 허물을 벗고 있다. 사위가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자작나무들의 소리 없는 합창을 듣는다. 그 신령스러운 기운을 한껏 들이마신다. 겨울로 갈수록 숲은 더욱 스산하고 어두워질 것이다. 그 속에 자작나무들만이 순백 알몸으로 서서 새봄, 새잎 나올 때까지 잠든 겨울 생명들을 지킬 것이다.

10m도 넘게 키가 훤칠한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 카펫처럼 푹신하게 깔린 낙엽을 바스락바스락 즈려 밟는 소리가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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