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6)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6)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06 15:4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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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6)

▶치사한 유언을 남기고 죽은 영국의 폭군 왕 헨리 8세(1491~1547·56세, 재위:1509~1547·38년)는 6명의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중 단 한 여자만이 그보다 오래 살았다. 그리고 그는 미망인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 형수인 캐서린이 미망인이 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이 지나 하나님과 교회가 그런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과 그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와 이혼했다. 또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레인(1507~1536·29세)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부정한 행동을 했을 거라는 추측으로 목을 잘라 죽여 버렸다. 그로부터 열흘 뒤, 다시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그의 새로운 부인은 귀족인 제인 시모어로 왕세자 에드워드를 출산하고 몇 주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다섯 번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는 그녀의 외도로 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만이 헨리보다 오래 살아서 그의 유일한 미망인이 되었다. 38년이라는 긴 재임 기간 동안 엄격하고 권위적인 통치로 6만 명의 사형을 집행하면서 수많은 전쟁과 향연을 벌였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우선 잠을 좀 자야겠소!”라는 유언을 남겼다. 역사가들은 이 자를 폭군이라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은 너무나 치사하지 않은가? 그의 손에 죽은 6만 명의 원혼을 어찌 위로할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술레이만 1세(1494~1566·72세, 재위:1520~1566·46년)는 오스만트루크 제국 최대 전성기를 이룩한 술탄(Sultan:이슬람교국의 군주. 특히, 오스만 제국의 황제를 이르는 말)이다. 재위 46년 동안 13차례의 원정을 통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페르시아를 압박한 그는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내치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566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헝가리를 공격했는데 갑자기 병환이 악화되어 원정 중 숨을 거두면서 사망 수 시간 전, 그가 평생을 기록했던 일기에 남긴 마지막 기록은 ‘요새(要塞)는 저렇게 불타고 있는데, 승리의 북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구나?’였다. 이 사람의 마지막을 보면 과연 인간의 욕망이란 어디까지가 끝인가?라는 공부를 하게 된다.

▶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닌 최초의 방계 혈통의 왕이었던 선조(宣祖:1552~1608·56세, 재위:1567~1608·41년)는 15세에 등극한 조선의 제14대 국왕이다. 이복(異腹) 숙부인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재위기간 중, 사림의 정계 장악이 확고해지고 동서 분당으로 인해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시작되었으나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그 밖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파견해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다. 그러나 1591년에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국토가 황폐화되고 전국이 전쟁터가 되어 개국 이래 내외적으로 가장 혼란한 상황을 맞았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말이 있어도 듣지 말라. 영창대군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광해군에게 남겼으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두 대비에게 효도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성색(聲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무덤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4-3에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 중 가장 작은 릉(陵)으로 목릉(穆陵)이다. 비록 성공한 왕으로 평가받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효심이나 몸소 검소함을 실천한 점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에게 국운이 따라 주지 않았을까? 필자가 명리학과 관상학 골상학 공부를 좀 한 바가 있는데 윤석열 대통령의 골상은 국운이 따라 줄 것 같기에 국운상승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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