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7)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7)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13 15:3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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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7)

▶신하의 병문안을 가던 중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피살된 프랑스의 왕 앙리 4세(1553~1610·57세, 재위:1589~1610·21년): 앙리 4세는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가 1589년에 사망하자 루이 9세의 후손인 부르봉 가문의 적장자(嫡長子)로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1572년 모친 잔 달브레 3세의 뒤를 이어 나바라 왕 앙리 3세로 즉위한 그는 종교전쟁 당시 개신교 세력의 수장이 되었다. 1584년 프랑스 왕 앙리 3세에 의해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그는 앙리 3세와 함께 가톨릭 신성동맹과 전쟁을 벌였다.

드디어 1589년에 왕위에 올라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랑스 왕국에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낭트 칙령을 통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존과 평화를 추구하였고, 30년간의 내전으로 피폐해진 왕국의 재건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신하인 막시밀리앙 드 베튄의 병문안을 가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파리는 난데없는 교통 혼잡 상태였다. 그리고 멈추어 선 마차 안에서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하면서 “으윽! 칼에 찔렸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들 거두었다. 며칠 전 모 종교에서 서로 상대방의 종교는 가짜라고 대서특필 비난하는 신문선전문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가 든다. 이건 아닌데... 어떤 철학자는 종교는 ‘호구지책(糊口之策)’이라고 했던가!

▶당쟁의 희생양이 된 임금 광해군(光海君:1575~1641·66세, 재위:1608~1923·1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비인 인목대비에게 후손이 없자, 선조는 첫째 아들 임해군(臨海君)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행동이 법도를 벗어나고 난폭하여 보류하였다. 그러자 다른 후궁 소생의 황자가 왕위를 넘보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선조는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고 대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하늘의 질투인가, 아니면 모함인가. 선조 36년(1606) 중전 인목대비에게서 늦게 왕자가 태어났으니, 바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이다. 이에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붕쟁(朋爭)은 가열되기 시작했으나 1608년 광해군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가 내려져 조선의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그를 지지했던 유영경을 사사(賜死)시켰다. 이어서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선조의 장인)을 처형하고 이듬해에는 영창대군도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가 참혹하게 죽였다. 또한 1618년에는 이이첨 등의 대북파가 인목대비의 폐모를 주장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횡포 또한 극을 치닫기 시작했다.

정권의 횡포가 계속되자 급기야는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성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폐위되고 주체세력이었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하여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지나가는 행인들이 보도록 했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붙인 반정군은 광해군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명나라를 멀리하고 오랑캐인 청나라를 섬겼다고 주장해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으나 후에 제주도로 옮겨져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면서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주도에서 장사를 지냈으나 1643년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37-4로 이장하여 부인 유씨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하였다. 한편 그가 죽은 시기인 음력 7월 1일 무렵 제주도에는 비가 자주 오는데, 이를 ‘광해우(光海雨)’라 칭하기도 한다. 그는 종묘에 들어가지 못해 묘호, 존호, 시호가 없다. 따라서 왕자 때 받은 봉군작호인 ‘광해군’으로 호칭되었으며 그의 묘소는 1991년 10월 25일에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로 유배될 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 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서울이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푸른 자연과 같이 아름다운 도읍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땅에 다시는 불행한 임금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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