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8)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8)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20 15:4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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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8)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한 후 귀국하였으나 형이 급사하면서 인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어 왕이 된 조선의 제17대 국왕 효종(孝宗:1619~1659·40세, 재위:1649~1659·10년): 군호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이다. 30세 때인 1649년(인조 27년) 5월, 인조가 승하하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청나라 인질 기간(8년) 중 형인 소현세자는 북경에 도착한 아담 샬 등의 천주교 선교사들과 만나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접견하였으나, 봉림대군은 인질 생활 내내 복수심과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다짐하였다.

청나라에서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 등 친청파(親淸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은 군부국(君父國)인 명(明)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논리로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체제붕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의 내실자강책(內實自強策), 즉 ‘국가재조(國家再造)’라고 하는 대내적인 지배안정책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세력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일련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 계획을 펼 수 없었다.

1651년(효종 2년)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책을 모색했다. 한편 1654년 3월 유명무실했던 영장제(營將制)를 강화,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의 약화를 시정하는 한편, 1655년에는 능마아청(能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1657년에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등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는 호전되지 않았지만 군비 강화와 경제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진전(陳田)이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여 유리(流離)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와 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농업생산력의 증대·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사학자 이이화(1937~2020)는 이를 두고 “국가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막중한 일을 추진하면서 국제정치의 역학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은 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만주 벌판을 달릴 허황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효종을 비롯해 일부 지배세력은 북벌 문제에 관한 한 거의 이성이 마비되었지만 민중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1659년(효종 10년) 5월 초부터 과로로 인하여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효종은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신하들에게 물어 침을 맞게 되었는데, 어의(御醫)인 신가귀의 진료를 받던 도중 실수로 침을 잘못 놓게 되어 출혈이 발생하여, 출혈을 멈추려 갖은 시도를 하였으나 오히려 출혈은 더욱 심해져 과다출혈로 사망하면서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효종에게 시침하였던 어의는 수전증(手顫症:손 떨림)이 있었다고 한다. 유언에서 말하는 가귀는 어의 신가귀를 말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염습(殮襲)을 하는 동안 시신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 독살설이 제기 되기도 했었다. 신가귀는 현종 대에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인조실록(仁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실록’·‘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편찬 간행했다.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무덤은 영릉(寧陵:효종과 인선왕후가 묻힌 합장릉)이라고 하며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327에 있으며, 1970년 5월 27일 사적 제195호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6·25동란을 겪은 이 땅에 아직도 ‘종북 좌파’가 있다고 하니 그들을 봉림대군처럼 8년만 북한에 인질로 갔다고 오라고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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