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충신의 지조
진주성-충신의 지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23 15:4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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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충신의 지조

역사를 산책하다 보면 옛 선비들의 지조가 참 그리울 때가 많다.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보면 이익에 따라 쉽게 당적을 바꾸고, 출세를 위해서는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지도자(?)들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1700년대) 송명흠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약간의 나이에 학자로서 촉망을 받았다. 영조 임금이 그 사람됨을 알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사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한참 뒤에 부호군으로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을 지냈는데 이 무렵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다.

영조는 세자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관례에 따라 대신들과 이름난 학자들을 어전으로 불러 이 문제를 상의토록 했는데 송명흠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왕의 뜻이 이미 세자를 죽이기로 굳힌 것을 눈치챈 대신들과 학자들은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때 송명흠이 혼자 나서서 말했다. “전하, 폭군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제왕들도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 그 선례를 남기시려고 하시옵니까?” 영조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해서 송명흠을 내쫓아버렸다. 그리고는 선전관에게 칼을 내리며 명령했다. “너는 곧바로 송명흠의 뒤를 밟다가 도중에 어느 집을 들르거든 두말없이 그와 그 집 주인의 목을 베어오너라. 만일 곧장 집으로 가거든 따라 들어가 왕명으로 형을 집행하러 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가 원망하는 기색이 없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딴 소리를 하거든 단칼에 목을 베어오너라.”

영조가 송명흠의 행동을 이렇게 알아보게 한 것은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다. 당시 당파가 나뉘어 싸우던 때라 그가 어느 당파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송명흠은 어전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왕명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안 있어 선전관이 들이닥치더니 참형을 받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송명흠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순순히 목을 내밀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전하께서 죽음을 내리시는데, 신하 된 자로써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선전관은 그때야 칼을 거두며 비로소 왕의 뜻을 이야기했다. 이에 송명흠은 “그것은 왕이 신하를 농락하는 짓이요. 예로부터 아무리 군왕이라도 신하를 농락해서는 안 되며 왕명은 중대하므로 한 번 떨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요. 어서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르게 하오.” 하였다. 참으로 조선 선비들의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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