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9)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9)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27 17: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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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9)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의 군주제를 폐한 올리버 크롬웰(1599~1658·59세·재위:1653∼1658·5년) 장군: 영국의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의 군주제를 폐하고 호국경(護國卿)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5년간 다스렸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잠을 잔다든가 마신다든가 하는 것은 내 뜻하는 바가 아니다. 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를 빨리 죽을 수 있게끔 서둘러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심리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여자는 돈에 집착하고 남자는 권력에 집착한다’ 했는데 크롬웰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순리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혁명가답게 다음과 같은 명언도 남겼다. ‘점점 나아지기를 포기한 사람은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멈추게 된다.(He who stops being better stops being good.)’

의회 정치가 최초로 시작되었던 영국에서 수많은 정치가들 중 가장 다양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는 올리버 크롬웰을 꼽을 수 있다. 17세기 영국 최초의 공화정을 실시한 혁명가이자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영국 의회 정치를 이끌었던 뛰어난 정치가인 반면 한편으로는 무리한 아일랜드 정벌을 일으키면서 잔인하고 혹독한 전쟁을 지속했던 무자비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영국의 정치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항상 극명하게 나뉘는 편이며 이로 인해 그의 업적에 대한 찬반 논란은 지금도 뜨겁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권좌에 있었던 사람이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는 대인이었던 사람인 것 같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최초로 왕비 외에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던 제18대 왕 현종(顯宗:1641~1674·33세, 재위:1659~1674·15년): 그는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있던 1641년(인조 19년) 3월 14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성은 이(李), 휘는 연(棩), 초명은 원(遠)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유약하였는데 재위 15년 동안에도 건강한 날이 없었다. ‘현종실록’·‘현종대왕행장’에 전하는 현종(顯宗)에 대한 평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홍수・가뭄・서리 등의 재해가 없는 해가 없었고,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다. 그러나 왕은 근심하고 수고함으로써 하늘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진심으로 아끼면서 백성의 생명을 지켰다.

안으로는 여색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유희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자 “동궁(숙종), 내가 죽더라도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재상이 계신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영의정 허적(許積:1610∼1680)과 우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 두 재상에게 부탁하고 믿어라. 그리고 할마마마, 저는 이제 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제가 용상(龍床)에 앉은 지 15년이지만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습니다. 선왕(효종)이 갈구한 국치(國恥)를 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어 너무 원통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

묘는 정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와 합장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에 있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 지정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으로 이후 소휴연경돈덕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의 존호(尊號)가 더해졌다. 진정한 애민(愛民) 애족(愛族)을 몸소 보여 주였던 군주였던 것 같다.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3대 왕 찰스 2세(1630~1685·55세, 재위:1660~1685·25년): 25년간 영국을 통치했던 왕이다. 두 차례나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렀다. 그는 만년에 4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의회와 대립이 심화되어 ‘명예혁명’의 한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쾌락을 조금 추구했다고 해서 신이 그 사람을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왕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즐겼다. 왕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오만함을 가지고 있었다면, 역시 자신이 다스리는 영국의 시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 죽기에 참으로 마땅치 않은 시기인 것을 알지만, 아무쪼록 양해해주기를 바란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의 묘비에는 ‘여기에 우리 왕이 잠들다. 그의 말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노라! 그는 어리석은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또 현명한 말도 한 적이 없었노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앞에서 언급한 올리버 크롬웰과 현종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왕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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