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한 해의 끝자락, 마음에 박힌 못을 뽑자
세상사는 이야기-한 해의 끝자락, 마음에 박힌 못을 뽑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2.17 17:0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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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한 해의 끝자락, 마음에 박힌 못을 뽑자

어느새 12월이다. 시간 열차가 지나간 철길 위엔 동그라미, 가위표가 수북하다. 설레며 기다린 자국도 있고 통째로 지우고 싶은 흔적도 있다. 바야흐로 연말이다. 그간 소식이 뜸했던 지인이 안부를 물어 오고, 모임도 잦아지는 걸 보니 벌써 한 해의 끄트머리다. 길거리나 상점에도 울긋불긋한 장식의 크리스마스트리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한 해가 끝날 무렵임을 알려주는 유, 무형의 전령사들이다.

새해 새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또 다른 새해가 코앞에 왔다. 참 잘못 살았구나 하는 뉘우침부터 밀려든다. 사는 일의 고달픔과 덧없음이, 살아온 날의 탈진과 후회가 찌든 때처럼 쌓인다. 부끄러운 일들은 저마다의 가슴에도 자책의 못으로 되날아와 박힌다. 사람들은 못을 아무 데나 쉽게 박는다. 박히는 벽의 아픔은 생각지 않는다. 지난 한 해도 가족, 친구, 이웃들 가슴에 얼마나 많은 못을 박고 살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도/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김종철 ‘고백성사’)

아내에게도 차마 말 못하고 가슴에 묻어둔 일, 너무 부끄러워 차마 뽑지 못한 못, 저마다 하나 둘쯤 품고 있을 세밑이다. 그 못 시원하게 뽑아버리고 해넘이를 하고 싶지만 고해하고 용서 받는다는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에 대한 반성은 남에 대한 죄책 같은 것으로 번진다. 나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살아오면서 더불어 사는 것에 무심하지는 않았는지, 세밑이면 그렇게 남을 돌아보고 이웃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세밑은 나눔과 베풂의 시절이기도 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황인식 사무총장은 인터뷰에서 어느 이름 없고 얼굴 없는 기부를 얘기했다. “전북에선 해마다 12월이면 공동모금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주민센터 앞 화단에 가서 쇼핑백을 찾아가라’고 해요. 그 쇼핑백에는 수표와 함께 현금으로 천만 원씩 들어있기도 하는데, 늘 동전 몇십만 원이 꽉 들어찬 돼지저금통도 두 개가 있어요. 누군지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순수한 마음이 좋아 그대로 지켜보고 있어요. 올해도 기다려집니다.” 백만 원씩 묶는 ‘띠지’가 세밑을 태우는 얼굴 없는 온정을 추적할 단서가 되지만 동장은 누를 끼칠까봐 주인공 찾는 일을 포기했다고 한다. 큰 베풂도 좋지만 작은 나눔은 더욱 소중하다. 제 여유 없어도 가난마저 쪼개는 청빈의 마음이어서다.

황인식 총장은 “자기도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더 기부를 많이 한다”고 했다.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면서 첫 월급을 기부한 선생님, 점심을 굶으며 한 달치 점심값을 모아 보내 온 익명 기부자, 하루 수익금을 몽땅 보내온 순대 노점상 부부... 매달 일정액을 내는 이들도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불우이웃을 향한 기부가 파도같이 곳곳에서 일어나 꽃보다 아름다운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손길이 빈자일등(貧者一燈) 같은 사랑이다. 부처에 공양한 수만 등불이 바람에 꺼져도 가난한 여인이 정성으로 켜 올린 등불 하나는 오래도록 무명(無明) 세계를 밝혔다. 조상들은 초겨울 배고픈 까치가 쪼아 먹으라고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남겨뒀다. 살림은 넉넉지 못해도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 줄 알았다.

한 해의 끝, 새해의 경계에 서면 좌절과 극복, 절망과 부활이 맞부딪힌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과 부정(否定)은 언제나 참회와 정죄(淨罪)와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가고야 만다. 그 사색과 성찰은 한 해라는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한 해의 마루턱을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얻는 깨우침이다. 갈수록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지만, 언 가슴을 녹여주는 따스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전해올 때면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 해 남의 마음에 박은 못, 내 몸에 박힌 못 모두 뽑아내고 빈 가슴, 맑은 머리로 새해를 맞아야겠다. 작고 당연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세밑이어야겠다. 올 한 해 박은 못, 뽑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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