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2)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2.19 09:5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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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2)



▶조선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하였으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였으나 아들(사도세자)을 죽인 오명을 남긴 제21대 왕 영조(英祖:1694.10.31.~1776.4.22.·82세, 재위: 1724.10.16~1776.4.22·52년):성은 이(李), 휘는 금(昑)이며,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肅宗)의 넷째 아들이다. 경종이 즉위하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당시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의 정치 싸움) 등의 숱한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영의정이 노론이라면 좌의정은 소론을 임명하는 등 붕당 간 균형 인사를 했다. 이를 바탕으로 민생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의 세 부담을 줄인 균역법을 실시했고,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며 조선 중반 변화된 사회 체제에 맞춰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적용했다. 연산군 때 폐지됐던 신문고를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재위 25년(1749)부터 13년간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27세)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그전까지는 부자 간 사이가 좋았었는데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도세자의 광증(狂證:정신병)과 살인·폭행 등 패륜행위가 불거지자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다음은 그때 목숨을 걸고 “아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충언을 한 충신을 소개한다. 일명 ‘충신의 지조’라고 하는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1705~1768·63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약관(弱冠)의 나이에 학자로서 촉망을 받았다. 영조 임금이 그 사람됨을 알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사양하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참 뒤에 부호군으로 임명되고 찬선으로 경연관을 지냈는데 이 무렵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관례에 따라 대신들과 이름 난 학자들을 어전으로 불러 이 문제를 상의토록 했는데 송명흠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왕의 뜻이 이미 세자를 죽이기로 굳힌 것을 눈치 챈 대신들과 학자들은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때 송명흠이 나서서 아뢰었다. “전하, 폭군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제왕들도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 그 선례를 남기시려고 하시옵니까?” 영조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하여 송명흠을 내쫓아버렸다.

그리고는 선전관에게 칼을 내리며 명령했다. “너는 곧바로 송명흠의 뒤를 밟다가 도중에 어느 집을 들르거든 두말없이 그와 그 집 주인의 목을 베어오너라. 만일 곧장 집으로 가거든 따라 들어가 왕명으로 형을 집행하러 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가 원망하는 기색이 없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딴 소리를 하거든 단칼에 목을 베어오너라.” 영조가 송명흠의 행동을 이렇게 알아보게 한 것은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다. 당시 당파가 나뉘어 싸우던 때라 그가 어느 당파의 사주를 받고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송명흠은 어전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왕명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안 있어 선전관이 들이닥치더니 참형을 받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송명흠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순순히 목을 내밀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전하께서 죽음을 내리시는데, 신하 된 자로써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선전관은 칼을 거두며 비로소 왕의 뜻을 이야기했다. 이에 송명흠은 “그것은 왕이 신하를 농락하는 짓이요. 예로부터 아무리 군왕이라도 신하를 농락해서는 안 되며 왕명은 중대하므로 한 번 떨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오. 어서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르게 하오.”

역천의 기개가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은가!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역천집(櫟泉集)’이 있다. 영조는 숨을 거두면서 “전교(傳敎)한다. 대보(大寶)를 왕세손(정조)에게 전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삶의 대 역정(歷程)을 마무리하고 가는 길목에서 웬만한 사람 같으면 아들을 죽인 상처를 참회하는 유언을 하였을 법도 한데 권력에 대한 미련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을 보니 권력은 죽음을 초월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진(御眞)이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묘는 원릉(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인창동 66-20)에 있는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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