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의 단상-아름다운 인연-반세기 지기(知己)가 되다
전원생활의 단상-아름다운 인연-반세기 지기(知己)가 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23 09:4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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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원/수필가

공성원/수필가-아름다운 인연-반세기 지기(知己)가 되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까? 첫 만남은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의 능력자 어머니가 될 것이고, 아버지, 형제들, 가족들…. 자라면서 친구가 생기고 직장동료가 생기며 배우자가 생기고 나의 자식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 중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가족 구성원들, 그리고 어디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향로는 거의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학교에서 지도하는 교사들에 의하면 문제 학생의 배후에는 부모와의 소통이 안되거나 부재가 있다고 한다. 부모가 바로 서지 못하면 아이들은 설 곳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환경에서 다른 모습의 사람들, 친구나 직장동료들을 만나서 사회에 필요한 인격을 형성하고 협력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키우며 여러 영력에서의 동반자를 만들어 가게 된다. 그러나 만나는 이들 중에도 유익한 인연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만남으로 자신의 인생을 어둠 속으로 끌고 가는 악의 인연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인간관계들은 각자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에게 영감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통로로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최근엔 나의 휴대전화에 남겨져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이나 되는 이름 중에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모를 삼자(三子)도 있고 수년간 왕래가 없었던 사람들도 허다하였다. 아마 직장생활 중에 만났거나 스쳐 간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으로 짐작된다.

지우는 이름의 원칙은 과거 삼 년간 소통이 없었던 사람들이고 차츰 그 폭을 적게 해서 최소 1년 이내에 소통이 없었던 사람들, 가족 친지를 제외하곤 다 삭제할 생각이다. 꼭 남기고 싶은 이름이 있다면 지금 안부 전화를 할 사람들이다. 이런 노력에는 생각과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고 머리를 맑게 하여보다 자신의 내면에 충실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건강한 젊은이들은 남다른 만남이 추가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하는 병역문제이다. 대다수 젊은이에게 현실적으로 처음 닥쳐온 난제 중 하나이지만 이를 회피하고 싶은 생각도 솔직한 감정임을 숨길 수 없다.

최근에는 군 생활이 오랜 과거에 비해 많이도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힘든 강도는 비슷하다고 한다. 필자는 군 문제에 상당한 생각과 추억이 있다. 소위 약골로 태어나 튼튼한 육체를 가지지 못한 이유로 피하고 싶었고, 피할 수 없으면 가능한 편한 군대 생활을 기대하였었다.

입대해서 훈련을 받고 자대(自隊)에 배치되는 첫날에 세 명의 동기생들이 어느 내무반에 “고양이 앞에 쥐”같이 바짝 군기가 든 상태에서 전입신고를 하게 되었다. 최고 고참들이 나와서 몇 마디의 질문을 하곤 부서 배치를 선택받게 되는 절차였다. 나를 선택한 고참은 매화꽃이 피면 전역한다는 상병이었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에 업무를 익히고 후임자로서 조수로서 열심히 일을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배워야 하는 업무는 상업고를 졸업하고 주산에 능숙한 기능은 있어야 하는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었는데, 주산을 전혀 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아직도 전역을 얼마 남겨지지 않았던 사수가 왜 나를 이런 요직의 일을 맡게 하였는지는 지금까지도 궁금한 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제대를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독일 연수를 떠나기 위해 서울에 잠시 머물 때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여관에 머물고 있었던 나를 찾아온 사수가 짐을 싸게 하고 다짜고짜로 자기 집으로 데려간 것이다. 안양의 어느 조그마한 아파트였는데 연수를 떠나기까지 자기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거절도 못 하고 참으로 난감한 입장이었지만 곧 독일로 떠날 것으로 생각하고 신세를 지게 된 것이 6개월이나 함께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연배이긴 하였지만, 아내도 있고 두 아이도 키우는 전형적인 은행원의 가정에 낯선 군대 후배와 오랫동안 같이 기거한다는 것은 부인의 입장에서 불가능한 환경임을 짐작할 것이다. 몇 번이고 연기가 되었던 출발에 문제는 더욱 꼬이게 되었고 우유부단하게 눌러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일은 아직도 나를 아찔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실 남자는 섬세함이 부족하고 여자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에 미숙하다지만 그의 아내, 형수는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미안해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일이다.

표현할 수 없고, 예기치 못한 더부살이로 인해 형님·아우가 되어, 가족끼리 가끔 만나고 더없이 좋은 관계를 지금도 유지하며 아끼고, 형제 이상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나에겐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인연이었던가.

지나고 보니 그때가 사실 나에겐 일생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 독일로 가기 위한 도전에 불가피하게 생겼던 어려운 상황에서 군대 사수의 따뜻한 손길은 현재 내가 지탱하고 살아가는 물리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의 원천이 되고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군대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 하지 않은 편이다. 대부분의 힘든 시간이 훈련이나 업무보다 상하 복종적인 관계와 개인에게 상처를 남기게 되는 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에서 사수, 조수로 만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50여년 가까이 변치 않는 연을 이어 가는 사람이 이 땅에 또 있을까 싶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약속한 해외여행도 같이 하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는 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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