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4)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01 14:4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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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4)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2.22~1799.12.14·67세, 재임:1789∼1797·8년):미국 독립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의 4분의 1을 지배한 대영제국을 물리치고 독립을 이뤄냈다. 프랑스와 우호조약을 맺어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참전시켰으며, 이어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페인까지 참전, 지브롤터해협을 포위하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미국 연합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항복을 받아냈고,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을 체결,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종전에 합의했다.

워싱턴은 언제 이러한 군사기술을 배울 수 있었을까? 흥미롭게도 그는 영국군 장교 출신이었다. 1754(22세)년부터 1763(31세)년까지(9년) 미 대륙에서 일어난 당시 세계 대전 급 규모였던 ‘7년 전쟁’의 일부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Indian War)에서 영국군 대령으로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7년 전쟁 자체를 영국의 승리, 북미 식민지 및 인도에 대한 헤게모니를 가져가면서 프랑스는 식민지 확장 경쟁에서 밀리게 됐다. 이후 막대한 부채가 쌓인 프랑스 왕실은 미국 독립혁명까지 도와주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초래하고 만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1990년대 히트를 한 영화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1992)의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워싱턴 입장에서는 영국군과 함께 싸운 경험이 후에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중요한 발판이 됐다.

미국의 첫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두 번의 대통령직을 마친 뒤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서관에게 자신의 맥을 짚어보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면서 “슬슬 갈 때가 됐군. 모쪼록 매장을 잘 부탁하네. 내가 죽으면 사흘이 지나기 전에는 묻지 말아주게”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죽음을 순조롭게 받아 들였거나 미련이 남았든지 한 쪽 이었던 것 같다. 부활을 기대했을까?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였던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1752.10.28~1800.8.18·48세,재위:1776.4.27~1800.8.18·24년):성은 이(李), 휘는 산(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11세 때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24세 때 재위하였으며 초기에는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정치를 하였으나, 재위 4년차가 되던 해인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親政)을 하였다. 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 간행·수원화성(水原華城:길이 5.52km. 사적3호,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에게 강의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서인(소론 벽파)의 스승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마지막 의식을 잃으며 숨을 거두면서 “수정전…. 수정전…”.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수정전은 당시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던 곳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까지 정조의 병간호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보살펴 준 왕후에게 고마움의 표시인 것 같다.

무덤은 융건릉(隆健陵)인데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에 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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