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이승만 대통령
진주성-이승만 대통령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03 16:0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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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이승만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초대 대통령, 2대 대통령, 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승만은 전주이씨이고, 형님 2명은 홍역으로 죽고 외아들로 성장했는데 초명(初名)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배재학당 재학 중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을미사변에 가담, 활동하다 지명수배를 받았다. 이상재,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 임원이 되고 제국신문을 창간했다. 이어 중추원 의관이 되었고 고종황제 양위에 가담했다가 벼슬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는데 탈옥하다 종신형이 언도되었다. 곧 가석방되었고 민영환, 한규설 등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워싱턴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학사와 석사가 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영세중립론” 논문으로 철학박사가 되었다. 귀국하여 YMCA 학감이 되어 지방 순회 중 진주교회를 방문해 예배에 참여하고 진주Y청년회가 조직되도록 주선했다.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해 ‘태평양잡지’를 창간했다. 서재필 박사와 한인대표자대회를 소집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호소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고 1933년 스위스에 가서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호소했다.

1934년 10월 국제연합회의에 참가했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뉴욕에서 결혼했다. 1941년 뉴욕에서 ‘일본내막기’를 출판하고 임시정부 외교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1945년 10월 환국해 미군정청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유명한 연설을 했다. 1946년 4월 트루먼 대통령과 반공단일노선을 천명하고 1948년 이후 함양, 산청, 합천, 진주 양민학살을 방관했다.

194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제1순위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이시영 부통령과 2명만 서로 주고받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으나 활동을 제한하고 와해를 방치했다.

1950년 8월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진주를 방문했을 때 촉석루 수리비 요구를 받고 뒤에 국비가 하달되었고 진주교회를 방문했다.

1960년 3월 이기붕 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개인 투표지를 펼쳐 확인하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학생들이 일어났고 곧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서거했고 국립묘지에 안장(1965년 7월 29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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