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5)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08 10:5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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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5)

▶쓸쓸하게 죽은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 Ⅰ세(1769~1821·52세, 재위:1804~1815·11년)에 대해 2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35세 때인 1804년 인민투표로 프랑스의 황제에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은 첫 부인 조제핀을 사랑했지만, 황제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40세 때인 1809년 이혼(저택과 많은 재산을 풍족하게 배려했다)하고 다음 해 오스트리아 황실의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여 42세 때인 1811년 아버지를 닮은 아들을 낳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승전을 계속하던 중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1758~1805)에게 격파되어 영국 침략에는 실패했지만,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꺾음으로써 프랑스는 전 유럽을 제압했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 45세 때인 1814년 영국 등 대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이탈리아 서해안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2월 동맹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프랑스 황제에 즉위했으나, 워털루전투에서 동갑내기 영국의 웰링턴(1769~1852) 장군에게 패하여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웰링턴은 추후 동시대 가장 훌륭한 장군이 누구냐는 질문에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바로 나폴레옹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군사 전략가로서 나폴레옹 능력에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그곳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한평생을 극단적인 두 모습으로 살다 간 파란만장한 인물. 천하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 마음껏 그 위용과 만용을 발휘했을 때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다면, 전쟁에 패해 유배지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던 만년은 그 인생의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 그가 유배지에서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무렵 하루는 옛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나폴레옹은 의외로 매우 밝은 모습이었다. 과거의 권력과 명예를 거세당한 옛 영웅의 모습치고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행복해 보였다. 친구는 나폴레옹의 그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 유배지에서의 고통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혹시 정신이상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어 물었다. “자네,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그러나 나폴레옹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내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없다네. 그것은 과거에 불과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내가 정말 행복했었다는 말은 아니네. 그때 나는 정말 불행한 존재였지. 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네. 내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일세.”

나폴레옹의 고백에는 속인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진실성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제 자신이 가장 어렵고 비참한 때를 맞이하면,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을 되찾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느낄 줄도 안다. 가장 불행할 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흔히들 새는 죽을 때 슬픈 소리를 내고, 사람은 죽을 때 착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뼈를 세느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곁에 있게 해 달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때는 단지 여섯 번 밖에 없었다.” 그의 시체는 주변국들의 결정에 따라 그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세인트헬레나 섬에 묻혔다. 유해에는 황제복이 아닌 군인 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그의 묘비에는 ‘여기 눕다’라는 짤막한 글만 새겼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자기네 국민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제 침략자 나폴레옹은 죽었으며, 그의 시체는 납으로 된 관 속에 넣어져 자물쇠가 굳게 채워진 채 세인트헬레나 섬 롱그우드 모래 밑에 묻혔다. 섬의 주위는 절벽과 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나폴레옹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영웅이었던 그의 유해가 유배지로부터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그가 죽은 지 20년이 지난 후였다.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죽은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신화에 일조했다. 장례 때 입혔던 유니폼, 레지옹도뇌르 훈장, 게다가 다리 사이에 놓아둔 그의 유명한 모자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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