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속버스에서 목격한 아름다운 사람
세상사는 이야기-고속버스에서 목격한 아름다운 사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21 12:3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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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고속버스에서 목격한 아름다운 사람

오랜만에 하는 서울 나들이었다. 차창 밖에는 흐린 겨울 기운이 들판과 낮은 산들을 회색빛으로 감싸 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나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마스크를 하고 목도리를 두르고도 외투를 벗어 몸을 덮은 채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조금 전에 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 그려지는 과정의 이야기와 예수의 손에 들려 있다가 지워진 은잔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뜬 건 아이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뒷자리 아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처럼 잠에서 깬 사람도 많고 짜증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아이를 제대로 달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운전기사는 운전기사대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한 몸을 뒤로 기댄 채 말없이 참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가장 힘들고 몸이 다는 사람은 아이 엄마이다. 고만고만한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을 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고 칭얼대니 엄마는 얼마나 몸이 달겠는가. 히터를 틀어놓아 공기는 답답해지고 건조해져 아이가 보채는 게 아닌가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뒷자리라서 많이 흔들릴 테고 쾌적한 공간이 아닌 갇힌 장소에서 여러 시간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실려가는 동안 몸 어딘가 불편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조용히 안전벨트를 풀더니 귤 두 개를 뒷자리의 우는 아이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작은 소리로 뭐라고 몇 마디 하며 아이를 달래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귤을 받아든 이 아이는 천천히 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신기하게도 아이는 거기서 울음을 그쳤다. 무언가 울음을 통해서 제 답답한 상태를 호소하고 싶었던 아이는 낯모르는 사람의 호의에 그만 가슴속에 막혀 있던 불만족스러운 그 어떤 것 하나가 풀어진 것 같았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엄마는 마음을 놓을 수 있고, 나머지 승객들은 조용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운전기사는 다시 평온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을 수 있게 만든 이 여자의 귤 두 개는 단순한 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짜증스러워할 때 아기를 달래는 엄마를 어떻게 도와야 할까를 생각한 이 여자의 마음이 아기 울음을 잠재운 게 아닌가 싶었다. 제게 오는 불편함만 생각하고 누구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 이분이 한 작은 일은 그 차를 타고 가는 마흔다섯 명 모두를 편안하게 하고 이롭게 한 행동이 되었다.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이 여자 역시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가고 있었다. 아이가 까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귤껍질을 아이에게 자기 손으로 주워 봉지에 넣게 하는 이 여자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몸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막히고 밀리는 길 때문에 버스가 예정 시간보다 더 걸려 터미널에 진입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벌떡 일어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엄마는 이렇게 말하였다. “천천히, 다른 사람들 내린 다음에 천천히 내리자.” 자기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그 자리에서 행동으로 가르치는 엄마의 얼굴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운 사람은 순간순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신해야 하는가를 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스스로 행복해지고 남에게 고마운 사람이 된다는 걸 안다. 훈훈하고 따뜻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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