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 동장대와 김준민 장군(판서)
진주성-진주 동장대와 김준민 장군(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24 12: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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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 동장대와 김준민 장군(판서)

동장대의 위치는 진주 중앙시장과 기업은행 진주지점 사이에 있었다. 현재 기업은행에 가보면 약간 언덕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동장대(東將臺)’는 조선시대 진주성에 설치됐던 4개의 장대중 가장 바깥쪽 성벽에 위치한 동북쪽 누각을 말한다. 진주성을 돌면서 바로 동쪽 장대가 보이지 않는다고 묻는 이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김준민(金俊民)은 영남의 전공으로 으뜸이다, 형조판서에 추증한다고 기재되었다. 임진왜란 때 동문인 동장대에서 전사한 김준민 장군이 전사한 곳이니 동상과 표지판을 세워야 한다. 필자가 김준민 장군 신도비를 경남도 문화재 306호로 지정케 했다.

사람들이 둘러본 성벽은 진주성 내부 성벽이었고, 외 성벽은 이미 헐려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어 외 성벽의 장대인 동장대를 볼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동장대는 진주성의 취약지를 방어하던 외 성벽의 신북문과 남문 사이에 위치해 엄청난 접전 장소가 됐다.

왜군은 2차 진주성 싸움 때 동장대의 양쪽에 있던 성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진주성을 겨우 함락했는데, 이때 왜군들은 동쪽 외 성벽 방어의 주요 지휘소였던 동장대를 사정없이 파괴해 버렸다. 그 후 광해군 때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부서진 동장대를 고쳐 세웠고 영조 때는 ‘여지도서’를 발간하면서 ‘우병영지도’에 동장대가 남았다. 지금의 북장대와 비슷한 규모와 모양을 갖춘 그림이 있어 짐작케 한다.

그런데 옛 관찰부와 경남도청의 정문이었던 영남포정사가 최근 들어 옛 대변루라고 잘못 설명한 일도 있었다.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에 있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성지’조에 동장대가 바로 대변루임이 명확하게 하기 때문이다.

동장대는 대변루라는 이름과 함께 진주성의 4대 장대중의 하나로 수 백년동안 존속해 왔다. 그런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06년 12월에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동장대는 하룻밤 사이에 파괴되고 말았다.

동장대가 사라지자 일제는 철거 비용을 줄이게 됐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동장대 일대에 신시가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제는 동장대 터에 식산은행과 사택을 지었고 1939년에는 일본식 동명도 지었다. 개점 20일 만에 지점장이 죽자 김준민 장군이 죽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해방 후 장대동(將臺洞)과 동성동(東城洞)이라고 이름만 짓고 건물은 재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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