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합천의 겨울 산방 풍경
세상사는 이야기-합천의 겨울 산방 풍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28 14: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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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합천의 겨울 산방 풍경

오래전 귀촌하여 꿀벌 키우며 노후를 뜻깊게 보내고 계신 형님이 사시는 경남 합천 산중을 찾아 하룻밤 묵었다. 눈이 내리고 난 뒤 기온이 뚝 떨어져 쌓인 눈이 녹지도 않고 그대로 있는데 아침부터 풀풀 눈발이 날린다. 눈이 내리면서 눈밭에 희미하게 지워진 먼 산과 건넛산 능선의 낙엽송과 가까운 숲 나무들의 원근이 살아나면서 황홀한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회색빛이 감도는 고동색으로 적막하기만 하던 산 풍경을 한순간에 바꾸어놓았다. 생의 가장 헐벗은 날을 견디고 있는데 그 위에 혹독한 시련까지 내려 쌓여도 그것을 찬란한 의상으로 바꾸어 놓고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시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물이 나오질 않는다. 어젯밤 늦게까지도 괜찮았는데 새벽에 얼었나 보다. 받아놓은 물도 없어 난감해하다가 집 옆 계곡물이 생각났다. 양동이와 바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사과밭 한가운데에 길게 산짐승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자국은 한 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일정하게 찍혀 있는데 마치 한 줄로 걸어간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발자국 사이로 몸을 밀고 간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가려고 하는 계곡까지 이어져 있다. 이 녀석도 물을 먹으러 내려왔다 간 것 같다.

그런데 계곡은 꽝꽝 얼어 있어서 물을 뜰 수가 없었다. 도끼를 가져다가 얼음을 깼다. 얼음장 밑에서 가만히 겨울을 나던 밤나무 잎들이며 그 잎 밑에 숨어 있던 애벌레나 실지렁이들이 놀라서 몸을 꿈틀거린다. 얼어 있는 곳 여기저기를 도끼로 깨놓았다. 그래야 짐승들도 물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 근처 둔덕에는 크고 작은 짐승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러나 길어온 한 양동이의 물은 먹을 수 없는 물이라서 데워서 머리를 감고 장독 위에 쌓인 희디흰 숫눈을 한 냄비 퍼다가 끓였더니 냄비에 절반 정도 찬다. 그런데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백설도 끓여보니 재와 티끌들이 물 위에 거멓게 뜬다.

온전히 순수한 것이란 본래 없다는 것일까. 이처럼 희디흰 눈도 허공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먼지와 티끌을 그 안에 품어 안고 내려왔던가 보다. 아무리 맑은 물도 백 퍼센트 순수한 물로만 이루어지진 않듯이 눈도 그런가 보다. 백 퍼센트 순수한 물은 증류수라서 어떤 면에서는 물이라 할 수 없다.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맑은 물도 그 안에 어느 정도의 미생물이 들어 있듯, 순백의 희디흰 눈도 그 안에 먼지를 품고 있듯, 사람도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하며 사는 것이다. 햇빛하고도 섞여 지내고 먼지와도 같이 사는 것이다. 물론 햇빛을 늘 가까이하면서 살지만 먼지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숨 쉬며 사는 일이 그렇다.

마당 끝에 음식 쓰레기 놓는 곳에다 시래기와 밤을 갖다 놓았다. 눈 위에 가져다 놓은 이것들을 짐승들이 발견하고 허기를 메꾸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돌아서 몇 발짝 떼는데 앞산 비탈에서 버스럭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어린 고라니 두 마리가 산을 넘어 내려오다가 나를 보고 멈칫한다. 내 딴에는 내가 안 보이게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다고 얼른 몸을 움직였더니 고라니는 고라니대로 내 몸짓을 보고 놀라 흩어진다.

한 마리는 아래쪽으로 빠르게 달려 내려가고 한 마리는 덤불 속으로 들어간다. 집근처까지 짐승들이 내려오는 걸 보니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기 어려운가 보다. 설화 만발한 산속 집에 앉아 그 짐승들이 견디는 긴긴밤을 생각한다. 형님댁 산방에서의 하룻밤, 귀가 순해지고 마음이 둥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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