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9)
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9)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05 10:5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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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49)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1767~1845·78세.재임:1829~1837·8년):사우스캐롤라이나의 정착촌에서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다. 자수성가해 150명의 노예를 거느리는 농장주가 될 정도로 성공했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으며 연방법원 판사가 되어 7년 동안 판사생활을 하였다. 그 후 테네시주에서 하원의원에 오르면서 상원의원까지 지낸 뒤 정계에 진출했다. 24세 때 레이철 로바즈라는 유부녀와 사귀었는데 그녀는 아직 이혼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자기를 조롱하고 다니는 그녀의 남편과 결투를 벌여 자신은 몸속에 총알이 박혔으나 살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죽고 말았다. 평소 결투광으로 소문난 그는 무려 13번이나 목숨을 건 결투를 벌였다. 그는 판사 임기를 끝낸 후 8년간 잠적해 있다가 1812년 미국 - 영국 전쟁이 터지자 올드 히코리(Old Hickory:민병대) 부대의 지휘관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의 부대는 영국과 동맹상태였던 크리크 인디언을 토벌하고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미국 사상자:21명. 영국 사상자:2037명). 이 전투로 인해 차기 대통령 감으로 떠올라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퀸시 애덤스에게 패했으나, 민주-공화당에서 자신의 지지파를 규합하여 민주당을 만들어 61세 때인 1828년 재대결에서 애덤스에게 설욕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괴상한 취미가 있어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폴)에게 온갖 욕을 가르쳐서‘욕쟁이 앵무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가 죽었을 때 앵무새는 장례식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온갖 욕을 하다가 쫓겨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20달러짜리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 자기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울고 있는 가족들에게 “울지들 말아라. 착한 아이가 되어 천당에서 다시 만나 보면 되잖아.”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아내 옆에 묻혔다. 그는 천당에서 아내를 만났을 것이다. 죽음을 참으로 여유롭게 맞이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미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1767~1848·81세. 재임:1825~1829·4년):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재임기간:1797~1801)의 아들이다. 부자(父子)간에 대통령을 역임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생을 마감할 때 “양원 의원들에게 감사한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이다. 나는 만족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미국의 상하 양원은 대통령의 임종에 조의(弔意)를 표하는 뜻으로 회기를 연기했다. 대통령 재임시절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낙타와 지렁이를 키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대인이었고, 재미있는 삶을 살았다.

▶미국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1795~1849·54세, 재임:1845∼1849∙4년):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났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테네시 주에서 보냈다. 변호사·주의회의원·주지사·하원의원 및 의장을 거쳐 49세 때인 1844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선거전에서 다른 후보들이 영토 확장 문제가 쟁점화 되는 것을 기피 하였으나 오히려 오리건 주 확장 및 텍사스의 병합을 내걸고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가 들은 그를 일컬어 미국 역사상 최초의‘다크호스’ 대통령이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생을 마감할 때 “사라,… 사랑해. 사…랑…해….”라는 부인에 대한 사랑 고백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행복한 죽음이라고 생각된다.

▶미국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1784~1850·66세, 재임:1849~1850·1년):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출생. 1808년 육군중위로 입대하여 1812년 영미전쟁(제2차 독립전쟁) 및 멕시코전쟁에 참전하였고, 자신의 인생 중 25년을 인디언 전투 최전선에서 보냈다. 64세 때인 1848년 선거에서 휘그당(黨)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50년 7월 4일 폭염 속에 개최된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관했다가 갑자기 급성식중독 증세로 닷새 후에 사망하면서 “죽는 건 여한이 없소. 다만 친구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던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었던가! 한다. 아마도 저 세상에서 그때의 친구들과 유유자적하다가 다시 환생하여 미국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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