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2)
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26 12:5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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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2)

▶파라과이의 독재자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즈(1792~1862·70세, 재임:1844~1862·18년):인디언과 스페인계의 혼혈인 것으로 전하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농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최고 권력기구인 제1집정관이 되었다. 1841년까지는 합헌적인 통치가 이어졌지만 그 후 헌정을 정지시키고 동료 집정관을 쫓아냄으로써 스스로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엄청난 권력을 거머쥐고 국토의 절반을 소유지로 만들었으며 정부의 수입을 자기 것인 양 생각했다. 파라과이의 상권은 대부분 그 가족들의 수중에 놓였다. 외국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럽의 기술자와 전문가를 끌어들여 경제 활성화에 힘썼던 점은 높이 평가받았으며, 야당세력에 관대하여 1844년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사망할 때까지도 여전히 횡행하기는 했으나 노예제와 고문을 공식 폐기시켰고 성직자에게는 가혹했지만 초등교육 개선에 힘썼다. 그는 유럽 열강 및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교전 일보직전에까지 치달았고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대통령이 파라과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아르헨티나 내전(1845~46)에 개입하기도 했다. 18년의 독재권력을 마감하고 생을 마감할 때 “파라과이 공화국은 아직 해결 못 한 문제가 많으니 칼보다는 펜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라. 특히 브라질에 대해서는”라는 유언을 남겼다. 권력자의 특징이 느껴지는 유언이다.

▶쿠데타로 축출되어 총살된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35세):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남동생으로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1864년부터 3년간 멕시코 제국의 황제였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이자 오스트리아 해군 총사령관으로 뛰어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1861년에 멕시코시티를 점령한 후 막시밀리아노를 황제로 추대했다. 남북전쟁을 끝마친 미국이 먼로주의에 입각하여 항의하며 멕시코를 지원하자 힘을 얻은 멕시코 군의 저항이 거세어졌고 프로이센마저 압박하자 프랑스 군은 1866년에 멕시코에서 퇴각하였다. 그는 1867년에 멕시코 군에 생포되어 처형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그대들을 용서하며, 그대들도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내가 흘리는 피가 나라를 위해 흘려지기를. 멕시코 만세, 독립 만세!”어쩌면 대인(大人)이 아니었던가? 한다.

▶미국에서 유일한 독신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1791~1868·77세, 재임:1857~1861·4년):미국의 15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기간에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노예제도를 반대하였으나 대통령으로서는 미국의 헌법이 노예제도를 보호하였고 그 법률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퇴임 후 남부에서 노예를 사들여 북부에 풀어주는 업적을 남겼다.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사람들이 어디 갔느냐고 묻거든, 최고 재판소에 소환되어 갔다고 알려주오.”유머감각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한 것 같다.

▶독재정치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파라과이 대통령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1827~1870·43세,재임:1862~1870·8년):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카를로스 로페스 대통령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파라과이군 사령관과 외교 사절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주재 파라과이 대사를 역임하던 동안에는 아일랜드 출신의 아내인 엘리사 린치와 함께 파라과이로 귀환하게 된다. 1862년 아버지 카를로스 로페스가 사망하자 군부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잔인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이후 일명 남아메리카의 나폴레옹을 자처했고 1864년 영토 확장을 위해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이 다투던 우루과이의 내분을 틈타 블랑코당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허락도 없이 아르헨티나 영토를 침범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우루과이·아르헨티나·브라질과 삼국동맹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처음부터 승산이 아예 없는 전쟁이었고 투유티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여 1869년 1월 수도 아순시온이 함락당하고 1870년 3월 1일 브라질의 카시아스 장군의 공격으로 부상을 당했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한 브라질 병사가 발포한 총에 맞아 전사했다. 파라과이는 삼국동맹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이구아수 폭포의 대부분을 잃었다. 8년간의 잔인한 독재정치를 했지만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조국과 함께 죽으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조국을 찾았으니 이 유언은 권력의 집착이 남긴 소산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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