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주년 3·1절 기획특집-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제105주년 3·1절 기획특집-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 최원태기자
  • 승인 2024.02.28 17:18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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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서 독립투사로 활동하다 일본헌병대에 희생당한 故 김학봉씨
고 김학봉씨의 종증손자 김수관씨가 일본 헌병 주재소가 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고 김학봉씨의 종증손자 김수관씨가 일본 헌병 주재소가 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함안군 대산면 평림장날 의거서

항일하다 일본군 몽둥이에 즉사

소달구지에 실려가 사라진 주검
김수관씨 등 유족들 생생한 증언

“종증조부의 억울한 희생 기릴
위령비 세워 호국혼 위로해 주길”



3·1독립운동 제105주년을 앞두고 함안군(대산면 평림리 259) 일원의 독립운동 당시 일본 헌병대에 희생당한 독립투사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줄 것을 그 유족이 호소하고 있다.

기자는 지난 27일 일제하에서 독립투사로 활동하다 일본헌병대에 희생됐다는 고 김학봉씨의 종증손자, 김수관(68·창원시 진해구)씨를 만나서 그의 증언을 들었다.

함안독립기념사 증보판.
함안독립기념사 증보판.

김수관씨는 “남은 평생의 소원이 종증조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것”이라며 “이 일은 종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붙잡고 당부한 유언이다”고 밝혔다.

김수관씨에 따르면 지난 1919년 3월 12일, 함안군 평림장을 보러 온 칠원과 산인, 의령 등지에 온 약 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종증조부 김학봉씨 등을 선봉으로 ‘나무전’(땔감을 사고 파는 곳)에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이 끝나고 해산할 무렵, 일본군 협력자의 밀고를 받은 진해 주둔 일본 헌병대가 뒤늦게 출동해 총칼과 몽둥이로 군중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앞서 행동하던 김학봉씨와 성명불상의 한 남성을 몽둥이로 쳐서 즉사시켰다.

이어 헌병들은 동네 나무전 앞에서 김학봉씨 등 2명의 시체를 소달구지에 실고 그 위로 가마니를 덮은 채 마산과 함안 가야로 나눠는 갈래 길 중 마산 방향으로 사라졌다는 것.

당시 김학봉씨의 형인 김희석씨는 일본헌병에 의한 동생의 희생을 알면서도 서슬 퍼런 일인에 붙들려 어떤 변을 당할지도 몰라 동생의 시신을 찾아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0대 후반의 만삭이었던 김희석씨의 부인은 바로 눈앞에서 싸늘한 주검이 돼 어디론가 사라진 시동생(고 김학봉)을 생각하며 망연자실했다.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마을 전경.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마을 전경.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본헌병은 고 김학봉씨와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한 자들을 수소문하는 가운데 고인이 된 김학봉씨의 형 김희석씨 집 대문 앞을 서성이며 행방을 추적했다.

이를 눈치 챈 김희석씨는 몰래 담을 넘어 도주, 처가댁 창고의 벼 짚더미 속에서 한 달이 넘도록 숨어 지내는 가운데 야음을 틈타 가족들이 음식을 제공해 몰래 끼니를 때웠다.

이에 혈안이 된 일본 헌병은 김희석씨 집 대문 10m 맞은편에 가로세로 2m정도의 콘크리트로 축조된 주재소(검문소)를 차려 놓고 줄곧 감시했으나 약 두 달이 지나도록 행방이 묘연하자 결국 포기하고 철수했다.

함안군의 독립운동사건은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함안 지역의 연속적이고 공세적인 시위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같은 해 3월 12일 평림장 사건에 이어 3월 21일경 군북 장날과 그 다음날인 22일 함안장(현 가야장)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 의사들은 대구형무소 또는 부산형무소 등지에 투옥됐다.

함안군 대산면 평림 마을 우시장이 있던 곳.
함안군 대산면 평림 마을 우시장이 있던 곳.
평림 마을을 굽어보는 포구나무와 팔각정.
평림 마을을 굽어보는 포구나무와 팔각정.
6·25때 불에 타서 없어진 대산초등학교.
6·25때 불에 타서 없어진 대산초등학교.

이를 기자에게 제보한 김수관(68)씨에 따르면 그의 나이, 두 살이 된 때에 22세 된 어머니를 홀로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돼 김희석씨의 부인이자 종증조모가 되는 노순옥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김수관씨는 “나를 거두어주신 종증조모께서는 평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시동생인 김학봉 종증조부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며, “내가 12세가 되던 무렵 사망하시기에 앞서 내 손을 붙잡고 이 같은 말씀을 유언처럼 남겼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수관씨에 따르면 현재 평림 동네에는 약 10세대 가량이 거주하고 있지만 사건 당시 100세대가 넘도록 많이 살았다.

동네 어귀에는 소정글(우시장)과 함께 동네를 굽어보는 팔각정 곁에 백년이 된 포구나무가 있으며 그 위쪽 언덕바지엔 6·25 격전지였던 대산초등학교 건물은 전화(戰火)로 사라진 채 운동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와 같이 일제 점령 하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면서 그 기록이 후대에게 남겨지기도 했으나 김학봉씨의 경우는 일본군에 의해 몽둥이로 무참히 살해당하고 그 유해마저 찾지 못한 유족들은 무심한 세월 속에 상흔으로 남게 됐다.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259번지에 주소를 둔 고 김학봉씨의 호적서류.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259번지에 주소를 둔 고 김학봉씨의 호적서류.

이에 대해 김수관씨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일본헌병의 몽둥이에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아직도 그 유해를 찾지 못하는 유족의 기막힌 슬픔에 대하여는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면서 “때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비명횡사한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나무전 일원에 ‘기념비’ 또는 ‘위령비’라도 세워서 고인의 호국 혼을 위로해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고인에 대한 후손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간과해선 안 될 중대한 사안인 만큼 항일독립운동사적인 재조명과 함께 희생자와 우국충정을 기리고 유족에 대한 위로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함안군청 복지정책과 이상현 주무관은 “함안군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역사적 진실을 추적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함안군항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이규석 선생의 저서를 바탕으로 아직도 남겨진 진실을 쫓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주무관은 “이런 속에서 함안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을 계획하고 전시물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 12월 20일부터 읍면에 12개 현수막을 붙이고 관련 고문서와 유물, 사진, 편지 등에 대해 기증기탁 또는 확보하기 위해 수집공고문을 내고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인에 의해 돌아가셨다는 고인의 경우, 찾고 있는 명단에는 없는 분이시지만 일본헌병의 폭행으로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라면 서훈을 받아 마땅할 것”이라며 “이규석 선생이 평생 발품을 팔아 희생자를 찾았는데 왜 명단에 없는지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상현 주무관은 “함안군에서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분이 총 아흔명이 넘는데 대부분 얼굴이 없어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후손을 통해 사진 또는 묘사한 인물화라도 확보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함안군독립운동 기념관 조감도. /함안군
함안군독립운동 기념관 조감도. /함안군

함안문화원이 발행한 이규석 함안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장의 저서 ‘증보 함안항일독립운동사’ 73P에는 ‘대산면평림장날 의거‘란 제목과 함께 의거가 일어난 발단과 배경, 독립선언문 작성과 태극기 제작, 배부, 구금 등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열거돼 있으나 당시 희생됐다는 망자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함안3·1 운동은 치밀하고 연속성을 가지면서 각계각층에서 참가한 그야말로 전 군민적 만세 운동이었다.

함안군은 이를 배경으로 함안독립운동기념관 전시사업을 갖기로 하고 지난 1월 9일 함안군청에서 착수보고회를 열었다. 이에 함안군은 외형적 성과에 못지않게 그 내면적 진실 앞에 한걸음 더 성큼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최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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