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길을 찾아 시간을 유영하는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길을 찾아 시간을 유영하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03 15:5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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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담/시인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 길을 찾아 시간을 유영하는

대문 앞 쓸다가
모로 누워있는 소주병 하나 주웠다
쓰레기 더미에 몸 숨긴 채
억지 잠이라도 청한 것일까
제 몸 가둘 곳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그는
분명 쓰레기 봉지 이탈했거나
제 속 훔쳐 간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다
한 번쯤, 어느 심장에 강하게 박혔을
그러다 헐렁해진 마음에서 뽑혔을
생각은 깊고 가슴은 뜨겁다
홀로 설 수 없는 땅바닥에서
노숙자처럼 달빛 포개고 있다
알 수 없는 당신의 행방
빈껍데기의 설움 아는가
제 갈 길 찾지 못한 술병 하나
중얼거리는 소리 알 듯 말 듯 하다

(고안나 ‘술병’)

찬바람에 행인들 발걸음이 빨라지고, 해장국이 생각나는 밤이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안나 시인의 ‘술병’이다. 고안나 시인은 계간‘시에’로 등단하여 ‘양파의 눈물’, ‘따뜻한 흔적’ 등의 시집이 있다.

시인은 대문 앞을 쓸다가 모로 누워있는 ‘소주병’을 발견한다. 누군가 질근질근 씹어 피운 꽁초가 들어 있는 소주병을 보면서 ‘노숙자’를 떠올려 본다. 쓰레기 더미, 억지 잠, 버림, 빈껍데기, 설움 등의 시어는 역 근처 지하도에서 술을 마시거나 잠든 노숙자를 본 체험을 풀어내고 있다. 고안나의 시를 해석하는 데는 시적 대상을 대하는, 시인의 시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다 보면 군데군데 노숙자들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그들의 술주정에 행인들은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한다. 빈 병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나자빠져 있지만 늘 비상을 꿈꾼다. 어떤 날엔 가난한 창틀에 가난한 꽃이 피기도 하고 새가 내려앉기도 한다. 어김없이 플랫폼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발자국 빠져나간다.

노숙자들은 소주병을 생각하며 억지 잠이라도 청한 것일까. 그들은 쓰레기 봉지에서 이탈한 술병처럼 고독한 길을 나섰다. 가정이나 제도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박스에 싸여 잠자고 있는 그들의 눈꺼풀 사이로 꿈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별 부스러기들이 박스에 점점 쌓인다. 얼마나 고단한 밤을 뒤척였을까. 언제 지독한 취객의 지린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길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마지막 지점이 바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간직하는 단계”라고 한다. 홀로 설 수 없는 땅바닥에 빈 ‘병’은 외롭게 달빛을 포개고 있다. 달빛이 예리한 면도날처럼 지난날을 회상케 하지만, 소외감을 뭉갤 수 없다.
인적이 뜸한 곳에 잠들었다가 자칫 잘못하면 강추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아직 잘 곳을 찾지 못한 이가 인근 공중화장실 등에서 어렵사리 잠을 청하지만, 눈자위를 희번덕거리는 오래된 악몽이 먼저 와 앉아 있다. 노숙자들은 무료 급식소가 있는 곳에 달려가 허기를 채우거나 끼니를 거를 때도 있다.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들은 복지 사각지대에 있거나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은 이웃들이다.

술을 찾는 이유를 다 말하기 어렵다. 누구는 실직이나 가정해체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박과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를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누구는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가슴이 끓어오르면 그들은 노래 보다는 탄식을 먼저 한다. 토하는 한숨과 함께 굶주린 새가 되고 음울한 새가 된다. 그들은 박스를 덮고 부리를 쪼다가 새벽을 부른다. 날개의 움직임을 찾아 꿈속에서 발버둥 친다. 그러다가 황금색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마시곤 한다. 발끝이 문밖이고 동굴이다.

“제 갈 길 찾지 못한 술병 하나/ 중얼거리는 소리 알 듯 말 듯 하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방을 모르는 채 전철이 또 들어오자, 등 뒤로 새가 날아오른다. 전철이 화들짝 놀라며 창문이 하나뿐인 검은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시간의 창틀이 뜯겨나가고 전철이 또 들어온다.

치유되지 않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 길을 찾아 시간을 유영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온통 눈물과 생채기만 남아있다. 아직도 구름과 안개가 풀리는 블랙홀을 관통하고 있다. 지구별에 떨어진 우리는 '시간의 노숙자'다. 매 순간 만나고 헤어지는 “빈껍데기의 서러움”에 대해 고민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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