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3)
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04 11:3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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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3)


▶부통령을 하다가 전직 대통령의 조기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이어 받은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1800~1874·74세, 재임:1850~1853·3년):집안이 가난해 별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1828년부터 뉴욕주 하원의원으로 일하다가 1833년부터 연방 하원의원을 4회 지냈으며 1834년에 휘그당에 들어갔다.

1844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1849년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850년 7월 9일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재임 16개월 만에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도망친 노예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낼 수 있는 권한을 연방 관리에게 부여하는‘도망노예법’을 제정했다. 도망노예법 제정은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들과 휘그당 내의 강경파들의 반발을 샀고, 이로 인해 1852년 대선에서 후보자 지명을 받지 못했다. 1856년 대선에 도전했으나 패배했다. 생을 마감할 때 “구미가 당기는군!”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아마도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러시아 농노(農奴) 해방을 단행한 차르 알렉산더 2세 황제(1818~1881·63세):본명은 알렉산드로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이다.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황제)이다.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37세 때 제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군대식 통치와 크리미아전쟁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여론은 그에게 여러 개혁을 추진하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노해방을 비롯한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농노해방으로 인해 4,000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에‘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받았다. 개혁에 반대하는 젊은 혁명가(허무주의자들)들로부터 폭탄 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었는데 그가 목숨을 잃은 장소인 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피의 구원 사원’이라고 하는데 이 건물은 1883년부터 24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내부에는 당시 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 “나를 궁전으로 데려가다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것이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개혁이란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정치는 후퇴시켰지만 경제 근대화에는 관심이 많아 드넓은 국토 개발을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 공사를 시작했던 러시아 제국의 13번째 군주 알렉산드르 3세(1845~1894·49세, 재위:1881~1894·13년) 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자 국민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전제 군주제를 강화하고 수호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를 저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용납하지 않았다.

즉위 초기에는 선제(先帝)가 만들어놓은 개혁의 분위기가 지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격적인 반동 정치로 일관하였다. 또한 후계자인 아들 니콜라이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게 했고, 니콜라이 2세 80여 연간 (1830~1910) 계속된 반동 정치와 전제정치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참극을 만들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보통교육 등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오직 전제정치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만이 러시아를 보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혁명 분자들의 활동은 물론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억압받고 투옥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여러 곳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검열제도가 강화되고 교육의 자유는 축소되었다. 중앙 정부의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1889년에는 ‘지방관리관’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각 지방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반란에 실패했던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는 교육의 차별은 물론 제한구역을 두어 거주이전의 자유도 빼앗았다.

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1894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는 부왕(알렉산드르 2세)처럼 암살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1894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나면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공사를 완성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에 즉위한 그의 장남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 마찬가지로 전제정치를 하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면서 1918년 7월 17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대로 10년 뒤인 1904년 마침내 그 유언이 성취되었다. 위대하도다. 개혁이란 저항이나 다소의 희생을 동반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께서도 좀 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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