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채워진 술잔(3)
기고-채워진 술잔(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05 17:1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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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자/합천 수필가
문경자/합천 수필가-채워진 술잔(3)

여성회장이 혼자라서 내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속으로 ‘문경자 할 수 있어’ 하고 자신 있게 일어났다. ‘소 취 하’ 하고 그 다음은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누군가 뒤에 말을 알려주었다. ‘당 취 평’이라 했다. 나는 뜻을 알려주었다. ‘소 취 하’는 소주에 취하면 하루가 즐겁고, ‘당 취 평’은 당신에게 취하면 평생이 즐겁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건배사다.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 핸드폰에 저장해둔 시를 하나 낭독했다. 근데 또 J라는 회장이 안 보고 줄줄 외웠다. “문 회장 내가 시를 하나 했는데 뭐 괜찮지”하며 말했다. 술잔을 채우고 겨우 건배사는 마쳤다. 그냥 쉽게 ‘향우회를 위하여’ 했으면 깔끔하게 끝이 났을 텐데, 남보다 더 튀어 보겠다는 마음이 실패로 돌아가 이제는 쉬운 것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연말에는 모두 술을 술잔에 채우고 기쁨도 함께하면 좋을 것이다.

평소와는 달리 술을 많이 먹지 않았다. 순영이는 오늘 술이 잘 안 넘어간다고 했다. 몸살이 났는지 지금 상태가 조금 걱정이 된다며 차를 가지고 와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지난해보다는 술이 줄었고, 먹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는 말을 합창하듯이 하였다. 송년회라 술잔을 각자 채웠다. 감정과 추억을 섞어 가며 바글바글 거품이 있는 잔을 들어 ‘위하여’하고 술잔을 부딪혔다. 술을 먹지 못하고 들었다 놓았다 하니 재미도 없다고 했다. 연말에는 술 한잔하고 그래야 분위기가 살아난다. 한 모금이라도 하라는 말에 나도 한 모금을 마셨다.

고기를 먹었으니 차라도 한잔 마시자 했다. 오케이하고 승용차를 타고 서서울 공원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찻집에 가기 전 소화를 시키자 하며, 서서울 호수공원을 걸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고 있는데,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중년의 아주머니가 사람들이 걷고 있는 틈새로 지나갔다.

호수에 비친 주위에 밤 경관이 잘 어울려 좋았다. 찻집으로 들어갔다. 새로 생긴 찻집이라 3층까지 있는데 크고 넓은 분위기가 송년회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2층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단것은 몸에 해롭다”는 말을 하였다. 카모마일 3명, 1명은 생 딸기주스, 1명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술 건배사만 하는 게 아니라, 채워진 찻잔을 부딪히며 “건강을 위하여”하고 외쳤다. 차를 마시니 배 속이 편안했다.

새 단장을 한 찻집은 트리를 만들어 멋지게 장식해 놓았다. 그 앞에서 폼을 잡고 있는데 직원이 와서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요즘은 영업을 잘하려면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잘해야 한다. 12월도 번개모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각자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달라 헤어졌다. 거리에는 술에 약간 취한 사람들과 근처 식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로 악수를 나누며 발음이 얽혀져 외국 말처럼 들렸다. 채워진 술잔을 언제 마셔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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