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관심사
아침을 열며-관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11 13:4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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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관심사

이런 주제가 이 시대의 ‘관심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언젠가 ‘관심에 대한 관심’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도 있었다. 그것도 별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20세기 철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는 ‘관심(Sorge)’을 인간 현존재의 ‘존재(Sein des Daseins)’라고까지 규정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관심(Interesse)이 인식(Erkenntnis)을 결정한다”는 대단히 중요한 현상을 지적해 보여줬다. 나는 “관심은 한 인간, 한 사회, 한 시대의 정체를 보여준다”는 진리를 말해주고 싶다. 우리 자신의 성찰/반성을 위해서다.

지금 나의/우리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비교적 간단한 진단법이 있다. 관심은 표출된다. 요즘 시대는 그 표출이 일단 무엇보다도 ‘클릭’과 ‘터치’다. 이를테면 ‘좋아요’ 같은 것도 그중 하나다. ‘구독’ 같은 것은 더 적극적이고 더 확실하다. ‘댓글’은 조금 더 확실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지갑을 여는 것’이다. 그게 자기도 잘 모르는 ‘나’의 관심을 나에게 알려준다. 그 대상이 나의 정체,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셈이다. 그러니 지갑의 지출내역을 보면 관심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해 ‘나의 지갑’을 여는가. 젊은 여성 같으면 아마 화장품이나 패션 같은 것에 지갑을 열기도 할 것이고 젊은 남성 같으면 아마 스포츠 짐 같은 것에 그렇게 하기도 할 것이다. 대개는 돈이 되는 것에 돈을 쓴다. 로또 구매도 그런 하나다. 물론 이런 ‘지갑 열기’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간단할 턱이 없다. 거대한 가치론이고 복잡한 인간론이다.

책을 수십 권 저술한 한 가까운 지인이 출판사의 인세 정산서를 받아보고 “철학사에 관한 책이 1년간 4권, 공자에 관한 책이 1년간 9권 팔렸다더라”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나도 아는, 정부의 ‘우수도서’로 선정된 명저에 속한다. 그게 우리시대, 우리사회의 엄연한 현주소다.

그건 인문학적 관심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삶에서 멀어졌다는 징표다. 우리의 ‘정신/지성’을 ‘고양’시키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해온 귀한 언어들이다. 이제 ‘내면’을 가꾸는 데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물론 ‘위안’을 내세운 언어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아마도 ‘상처’와 ‘고통’이 많고 크고 깊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적 대세’라며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후과가 두렵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지성과 예술적 감성을 포기하면 ‘인간의 질’은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인간 아닌 인간’이 득시글거리는 그런 세상에서 나/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 자손들이 소중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어쩔 도리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질’을 포기하기 싫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람들의 관심방향을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다움’을 위해 클릭을 하고 지갑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책’이라면 가장 좋지만, 다른 방법도 없지는 않다. 영화나 드라마나 유튜브 같은 영상매체도 좋다. 틱톡도 좋다. 문제는 콘텐츠다. 고급진 인문학과 예술이 그 영상에 녹아들면 된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관심에 스며들면 된다.

2024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바쁘고 시끄럽다. 격동이지만 그건 역동의 일환이기도 해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그 격동의 한 복판에 ‘돈’ 내지 ‘밥그릇’을 둘러싼 격전의 광풍이 불고 있다. 국회에서도 불고 병원에서도 불고 대학에서도 분다. 공장이나 가게에서나 불지…. 티비 카메라가 연일 그 현장을 친절하게 중개해준다. 그 앵글이 우리시대 우리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를 향하고 있다. 좀 현기증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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