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마음이 기우는 밤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마음이 기우는 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17 16:03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마음이 기우는 밤

햇빛을 쏟아 밤이슬을 막으며
기둥만 끌어안고 있는 게르 한 채

(‘눈 내리는 게르’ 송미선)

우리는 눈을 번갈아 뜨며 별을 헤아렸고 낮달의 욕심이 길어지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핥아 눅눅해진 스낵을 찬 숨으로 녹여 먹으며 아직 남은 미련이 있는지 빈 봉지 속에 손을 넣었다 빼곤 했다 두 심장 거리에서 바스락대던 종소리는 새벽을 아침으로 조각했다 산책하러 나갈까 묻는 말에 눈이 내리네 답하며 나는 기차표를 만지작거렸다 심장박동이 잦아들고 있었다 계획이란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가끔은 플랫폼이라는 예외가 있었는지도 모르다 편도로 왕복을 고집했던 감정에는 구멍이 숭숭했다 바람이 외투 안으로 들이치는데 손끝이 시렸다

오늘은 송미선 시집 ‘이따금 기별’;』에 맨 먼저 실린 ‘눈 내리는 게르’를 소개한다. 송미선 시인은 경남 김해 출신으로 2011년 시전문지 ‘시와 사상’으로 등단했다.

지난여름 몽골의 게르에서 며칠 묵었다. 우리 일행은 별을 보기 위해 왔고, 유목민의 삶을 체험하고자 왔다. 별과 바람과 초원이 구멍 숭숭한 심장으로 들어와 핏줄 따라 구석구석 돌았다. 몽고점이 끌어당기는 걸까, 유목인의 얼굴빛이 낯설지 않았다. 이른 저녁은 별 양념 없이 푹 삶아내도 맛있는 양고기를 먹었다. 셀 수 없는 별도 비 내리면 볼 수 없다. 제발 별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대륙횡단 열차처럼 떼를 지어가는 가축이 보인다.

“기둥만 끌어안고 있는 게르 한 채”를 보면 기댈 곳 없을 때의 난감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붕은 욕심이라며, 사방 벽만으로도 부끄럽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몸뚱아리 하나 비빌 곳 없던 낯선 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부닥치며 지나온 일들이 몽골의 별처럼 생각났다. 그 시절엔 그랬다. ‘밤이슬'만이라도 피할 수 있는 곳이면 행복했다.

젊음이 있었고 읽을 책이 있었고, 희망과 꿈이 있었기에 어려움 속에서 지탱할 수 있었다. 그땐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외투 속에 조금 가려진 볼, 커다란 진한 갈색 눈을 가진 소녀와 함께 나는 행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꿈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상상 속에 있던 '도플갱어'가 있었다. 나는 내가 아닌 '기둥'을 붙들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난생처음 시간여행을 했다. "눈을 번갈아 뜨며 별을 헤아렸고 해가 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다가 서로의 팔에 안겨 꿈꾸었다. 깃발도 없고 외침도 없는 나약한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내 손바닥을 상대의 손바닥에 갖다 대면서 완벽한 대칭임을 확인했다.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나는 나의 존재를 먼 곳으로 내몰아버렸다. 어두운 밤보다는 햇살이 쏟아지길 바랐고, 가끔 친구를 만나면 분식코너에서 "스낵을 찬 숨으로 녹여 먹으며"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 "두 심장의 거리에서 바스락대던 종소리는 새벽을 아침으로 조각했다.”

게르 한 채가 밤이슬을 머금고 빛나고 있다. 바람이 마두금 연주나 몽골 전통음악 흐미처럼 귓전을 때렸다.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발성법이어서 신기하기만 했다. 유목민들은 해 뜰 때 가축과 함께 나가서 해가 져야 들어온다. 그들은 쌍봉낙타를 타고 산 정상에서 자기 가축을 바라보곤 했다.

‘기차표'는 새로운 환경이나 모험을 찾아 떠나는 ’유목민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나는 기차표를 만지작거렸다” 과연 지금 나아가는 길이 올바른 선택일까. 아니면 플랫폼에서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건지 차분하게 생각해본다. 심장박동이 잦아들고 있었다. 기차표와 플랫폼은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공감각적인 묘사에 도움이 되겠다.

꿈과 책이 있었기에 동경하거나, 갈망하는 마음이 아직도 시들지 않고 있다. "편도로 왕복을 고집했던 감정에는 구멍이 숭숭했다” 말의 거친 호흡과 내 숨소리에 깨어났다. 내 꿈은 아직 꿈으로 가라앉아 있다. 몽골의 마을은 고요하다. 왜소한 나처럼 마음이 기우는 밤에 별들이 살아 움직인다. 밤은 '외투'처럼 호흡하고 있다. 어디선가 가녀린 발과 가녀린 목소리의 소녀가 노래 부른다. 사내가 말에게 마구를 얹을 때 늑대 한 마리 게르 주변에 다가온다. 염소와 양처럼 함께 생활하던 내가 또 다른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일행은 비 내리는 날 울란바토르에서 이태준 선생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의료계와 정부 간에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요즘 이태준 선생 같은 넉넉한 외투가 생각난다. 손끝이 매우 시린 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