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3)
칼럼-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17 16:0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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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3)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역사고사(歷史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고문서를 필자가 직접 국역(國譯)한 자료이다.’

‘왜적과 김종서(金宗瑞), 그리고 수양대군(首陽大君)’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였다가 패하여 달아나 자신은 죽고 군사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다만 그가 거느리던 항복한 왜적 3백 명을 모두 죽여 없애려 하니, 왜적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역신(逆臣)을 따랐으니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마는, 조선인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소. 꼭 나를 죽이려 하면 조선인도 틀림없이 많이 죽을 것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소? 내가 마땅히 자결을 할 것이니 지켜보시오.”라하고, 마른 땔감을 모아 들판에 펼쳐 쌓아 놓고, 쌓아 놓은 땔나무 위에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는, 술을 다 마시자 백성들에게 사방에서 불을 붙이라고 하니, 일시에 타올랐다. 그가 과감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만약 그 용감함을 전쟁터에서 쓴다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에게 덤벼들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종서(金宗瑞)는 문무(文武)를 겸하였으며, 육진(六鎭)을 개척한 사람이다. 영의정이 되었을 때 집이 도저동(桃渚洞)에 있었다. 당시 세조(世祖)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서 왕위를 선양(禪讓) 받으려고 하였는데, 한명회(韓明澮) 등이 계책을 올려 반드시 김종서를 먼저 제거한 연후에 성사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소매에 철퇴를 감추고 사모(紗帽)의 한쪽 뿔을 뽑아 버리고 김종서에게 찾아갔다. 김종서가 말하기를 “공자(公子)의 사모에 한쪽 뿔이 없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수양대군이 손으로 귀밑털을 쓰다듬으며 거짓 놀란 체 말하기를 “말에서 떨어져서 몰골이 해괴하고 이상합니다. 대감께서는 반드시 여분이 있을 것이니, 가져와서 내 사모에 없는 부분을 채워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대개 김종서는 만 사람도 당해내지 못할 아들이 있어 늘 곁에 두었기 때문에, 잠깐 동안 그 아들을 떼어놓고 그를 치려는 것이었다. 김종서가 아들에게 안에 들어가서 사모의 뿔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자, 수양대군이 말하기를 “내가 매우 바빠서 오래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대감이 쓰고 있는 데에서 뽑아서 빌려 주면 좋겠습니다.” 라하고, 곧 몸을 일으켜 철퇴로 그를 쳤다. 김종서가 땅에 엎어져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아들이 달려 나오자 수양대군은 말을 타고 달아나 버렸다.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곧장 하삼도(下三道)로 가서 병사를 일으켜 도성을 범하는 것이 상책이겠습니다. 김종서가 중상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여자 옷을 입고 몰래 도성에 들어와 정부에 앉아 호령을 한다고 하니,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라하고, 마침내 사람을 시켜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에서 엿보게 하였는데, 가마 하나가 혜화문(惠化門)을 통해 들어갔다. 다가가서 보니 바로 김종서여서 즉시 죽였다. (다음 호에서는 김종득(金宗得)과 성우길(成佑吉)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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