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4)
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18 13:1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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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4)

▶한말(韓末)의 풍운아였지만 글자가 없는 백비(白碑)를 남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78세):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다. 12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가친척 없이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3세 때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으나 한직(閑職)을 지내며 때를 기다렸다. 대원군(大院君)이라 함은 왕위를 이을 형제나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임금이 승하했을 때 왕족 가운데 왕위를 계승하는데, 새로 오른 왕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조선시대에는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다.

이하응은 생전에 대원군에 봉해져 어린 왕을 대신해 대권을 위임받아 통치했으나 나머지 3명은 모두 죽은 후 대원군에 추증되었다. 따라서 보통‘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대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1873년까지 약 10년 동안에 걸쳐 개혁정치를 주도했다. 서원(書院)을 철폐해 지방 세력을 약화시켰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왕권의 권위를 놓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고 4대문을 출입할 때 문세(門稅)를 받았다. 한편 많은 백성들이 동원된 궁궐 공사뿐만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는 양반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원망도 컸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무엇보다도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서로 쫓고 쫓기며 벌인 정치적 암투에서 내려져야 할 것이다. 서로는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까지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했고, 나라를 더욱 도탄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왕이 아니면서 왕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국태공(國太公)이란 최고의 존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쇄국정책으로 세계의 흐름에 어두워 나라를 좁은 문 속에 가두어 놓아 발전의 틀을 막았다는 평을 남겼다. 대원군의 가장 큰 실수 두 가지는 세도 정권에 눌렸던 왕권 회복을 위한 경복궁 중건 공사이고 더 큰 실수는 쇄국(鎖國)이었다. 묘비나 신도비를 세우되 비문을 새기지 않는 비석이 있는데, 그 까닭은 지위는 높았지만 뚜렷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거나 청백리의 상징, 또는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에 근거한 여성의 비석일 경우가 많다. 또한 편지를 쓰되 내용 없이 백지를 그대로 보내는 것은 백간(白簡)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심정을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상대방이 자기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뜻에서 보내는 경우이다.

조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익(金熤)에게 김재찬(金載瓚)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어렸을 때 훈련대장이 그를 불러 병졸로 삼고자 했다. 당시 누구든지 훈련대장이 부르면 거절할 수가 없었는데, 김재찬은 아버지의 힘만 믿고 두세 번을 불러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명령을 거역하면 곧바로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김재찬은 자기를 잡으러 온 병졸을 보고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내가 정승이지 너는 아니다.”끌려가는 아들을 보고 영의정인 아버지는 편지 1통을 병졸에게 주면서 훈련대장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이 편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白紙)였다. 자식을 살려달라고 쓰면 국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백지 편지를 한참이나 들여다 본 훈련대장은 곤장 30대로 죄인을 다스렸다. 이후 아들 김재찬은 열심히 공부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가문의 부흥을 염원하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地官)이 귀띔을 해 주었다. “충남 예산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묘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것입니다.”이 말을 믿고 전 재산을 털어 가야사를 2만 냥에 매수한 뒤 가야사를 불질러버리고 석탑을 도끼로 부수고 그 자리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묘를 옮겼다.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의 일이다. 아들 고종과 손자 순종이 왕이 되었으니 목적은 이루었다. 전설에 의하면‘절을 불태우던 날, 탑을 바라보고 있던 돌부처가 돌아섰다.’고 한다. 근세에도 대권을 꿈꾸던 사람들이 선친의 묘를 이장했다는 소식을 듣곤 한다. 풍수의 매력인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인가? 생을 마감할 때 “주상(고종)이 한 번 보고 싶구나.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마지막으로 아들을 찾았지만 고종은 끝내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불효자란 오명을 쓰게 되었다. 묘비는 글자가 없는 백비(白碑)로 서 있다. 이 글을 쓰면서 혹시 묘(음택지)에 관한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을까 하여, 요즘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 〈파묘(破墓)〉를 감상했는데 풍수에 대한 기본개념이 전혀 나오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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