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5)
칼럼-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19 14:0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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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5)

‘강홍립(姜弘立)’
만력 무오년(1618년)에 건주(建州)의 종 노이(奴夷 : 청 태조 누르하치)가 중국과 원한을 맺어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성공하여 이름을 떨치고는 난을 빙자하여 변성(邊城)을 무찔러 함락시켰다. 천자가 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고는, 동한(東韓)에 격문(檄文)을 보내 함께 짝이 되기를 꾀하였다. 우리나라는 임진란 때 명나라가 구원해 준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모두 말하기를 “배말뚝 있는 곳에 물고기가 산다.”라고 하였다.

강홍립(姜弘立)에게 명하여 2만의 병사를 데리고 난리를 평정하러 가서, 기각지세(掎角之勢 : 사슴을 잡을 때 뒤에서는 발을 잡고, 앞에서는 뿔을 잡는다는 뜻으로,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을 말함)를 이루었다. 강홍립은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하면서 싸우려는 마음이 없고 항복할 뜻이 있었다.

기미년(1619년) 3월에 중국 유정(劉綎)의 병사들과 함께 호(胡) 땅에 들어갔는데 3백여 리를 가다가 호의 군대를 만나자 유정의 병사가 패퇴했다. 강홍립은 선봉이 되고, 김응하(金應河)는 홀로 서서 혈전을 벌이다가 수적 열세에 몰려 전군(全軍)이 패하였다.

그러나 강홍립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구원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오랑캐에게 항복을 하고, 온갖 아첨을 다 떨어 오랑캐 두목의 신임을 얻었다. 그가 심양(瀋陽)에 웅거하고 있으면서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모두 강홍립이 계획하고 지시한 것이니, 실로 천하의 죄인이다. 오랑캐 두목은 의붓딸을 강홍립에게 처로 삼게 하니, 사랑에 빠지고 미혹되어 노모를 다 잊어버렸다. 또 한윤(韓潤)의 유세에 넘어가 본국을 원수처럼 여겼으니, 몰래 그리워하는 것은 바랄 바가 아니었다.

정묘년(1627년) 봄에 호의 군대를 유인하여 이를 갈며 동쪽으로 와서 짓밟고 죽이니, 피가 천리나 흘렀다. 그 숙부 강인(姜絪)이 명을 받아 가서 효유(曉諭)를 하게 된 덕분에 화친을 하고 우호를 쌓기로 약정을 하였으며, 호의 군사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은 조정으로 돌아왔다.

임금 앞에서 대답한 것이 기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의 죄악을 논하자면 만 번을 죽여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태학생(太學生) 윤형지(尹衡志)가 소(疏)를 올려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결국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으나, 나쁜 평판은 만세 후에까지 전해지고, 공론(公論)은 백대 후에까지 남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랑캐 강홍립’이라고 부른다. 그를 위해 전(傳)을 지어 그 상세한 것을 기록하고, 여기서는 일단 한 가지만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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