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인절미
세상사는 이야기-인절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24 13:5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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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자/시인
백숙자/시인-인절미

씹을수록 더 고소하고 쫀득한 맛이 일품인 떡 식감이 좋은 인절미의 특징이다. 요즘은 몸에 이롭다며 인절미보다 쑥 절미가 더 인기다. 먹을 적에 고물이 떨어져 옷에 묻어 고민일 때도 있지만 먹을수록 입맛이 당긴다.

설 명절이나 혼례식 때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는 귀한 음식이기도 하다. 잘 찐 찹쌀을 절구통에 넣어 떡메를 치는 데 이때 떡메를 치는 사람은 근육이 울퉁불퉁한 팔뚝이 쎈 일꾼이어야 한다. 쫀득해서 팔뚝이 약한 사람은 절구통에 엎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명절이면 집 집마다 담장 너머 의식처럼 들리던 떡 메치는 장단 소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지금은 민속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풍습이다.

사라져가는 것 중의 하나!
어린 그 시절 우리는 어느 집에 떡메를 치는지 아이들끼리 미리 정보를 알아둔다. 가장 코가 예민한 아이들 세계. 아이들은 소문처럼 절구통을 빙빙 둘러서서 눈에서 나온 뜨거운 레이저를 떡판에 마구 쏘아 댄다. 매매친 떡을 콩고물 흠뻑 뿌려 놓은 도마에서 제상에 올릴 큰 떡을 썰고 나면 한입 크기로 썬다.

그리고 다 썰고 남은 떡 귀는 아이들의 차지! 우리는 서로 떡 귀 하나 더 받으려 땟국 묻은 소맷단을 들어 앞으로 쭉 뻗는다. 가끔 눈치 주며 밀어내던 야박한 어른도 있었지만 그건 또 동네 한 바퀴 뛰고 나면 잃어버린다. 흙을 콩고물처럼 주무르며 밤하늘 반짝이는 별의 고소한 향기를 콧등에 묻히며 자라서 그럴까? 아련한 장면들이 안개처럼 가슴에 슬슬 피어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인절미의 어원을 살펴보면 서기 4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삼국시대에 이미 백성들이 만들어 먹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조선의 15대 임금 폭정을 한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폐위시키고 조선 제16대 임금으로 추대된 인조! 1587~1624년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자기를 왕으로 만든 김류와 김자점 이괄등 반정 공신들에게 벼슬을 나누어 준다. 무신 이괄은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웠지만 다른 공신들에 비해 자기 일행이 턱없이 낮은 등급을 받아 평안 병사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관서 지방으로 파견된 데 불만을 품는다.

이때 암투에서 밀렸다는 걸 알게 된 이 콸은 인조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한다. 그에 놀란 인조는 왕궁과 백성을 모두 버리고 오직 저만 살겠다고 벼슬아치들과 충청도 공주까지 도망을 쳤다. 참으로 나약한 군주였다.

선주의 후궁인 할머니의 손자로 태어나 어쩌다 임금이 되어 자식과 손자와 며느리까지 죽인 가장 비정한 왕이다. 나라의 숙명이었을까? 쫓겨 온 임금을 위하여 인근 고을에 사는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올린 찰지고 쫀득한 떡을 먹으며 “맛있다” 절미라고 인조가 칭찬했다. 그런 의미로 떡을 바친 백성의 성을 따서 “임절미”라고 하였다. 그 후 자연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임절미가 인절미로 변하였다 : 인절미 이름 자체는 빈번한 또는 “반복”을 의미하는 한국어 인절과 떡을 의미하는 “미”에서 유래한다.

백제가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공산성 진남루에서 바라보는 인절미의 고장 공주


혼례식에 오르는 인절미는 찰지고 쫀득하고 고소한 맛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부부로서 새롭게 시작하는 신랑 신부의 앞날에도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의 마음과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내기를 바라면서 축하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생이란 길고 또 예측하지 못한 난 재를 만날 때 그 어려움을 부부의 힘으로 이겨내라는 뜻도 있겠다.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 그때는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다 보면 인절미처럼 쫀득하고 고소한 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뜻이 참으로 좋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담겨진 삶의 철학을 이 초봄에 새삼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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