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5)
전경익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25 13:3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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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55)

★근세 독일의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815~1898·83세, 재위:1861~1871·10년):1862년에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후,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써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1871년에 독일 통일을 완성했다. 군사확장에 반대하는 의회를 향해 ‘독일의 문제는 철과 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밀어붙인 것 때문에,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생을 마감할 때 ‘신이여, 믿습니다. 저의 불신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천국에 저를 받아 주소서 지금은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만으로는 인생의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다음과 같은 명언도 남겼다. ‘운명에 겁내는 자는 운명에 먹히고, 운명에 부닥치는 사람은 운명이 길을 비킨다. 대담하게 나의 운명에 부닥쳐라! 그러면 물새 등에 물이 흘러 버리듯 인생의 물결은 가볍게 뒤로 사라진다.’

★무정부주의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진 비운의 대통령:윌리엄 매킨리(1843~1901·58세, 재임:1897~1901·4년):미국의 제25대 대통령. 공화당 출신으로 연방 하원의원 및 상원의원, 주지사를 거쳐 1897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취임 후 6개월이 지난 1901년 9월 6일 뉴욕주 버펄로에서 개최된 범(汎)아메리카 박람회(Pan-American Exposition)에 참석하던 중, 무정부주의자가 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우리는 모두 같이 간다… 같이 간다… 같이 간다… 오 내 사랑(We are all going… We are all going… We are all going… Oh, dear)’ 국민을 사랑하는 그의 애국철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1898년 7월 하와이를 미국의 영토로서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죽어가면서 까지 신념을 피력했던 꿋꿋한 정치인 미국의 제22대 ·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1837~1908·71세, 재임:22대 1885~1889, 24대 1893~1897):미국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후보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백악관을 떠난 4년 뒤에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미혼이었는데 당선된 이듬해인 1886(49세 때)년 6월 당시 21세이던 프랜시스 폴섬과 결혼했는데, 그는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유일한 대통령이다. 클리블랜드는 어떠한 집단에도 특혜를 주지 않는 정책을 강력히 추구했다. 가뭄 피해를 입은 텍사스 농가에 곡물종자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달러를 지출하는 예산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러한 사안에 연방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면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과도한 보호를 기대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의 국민성인 강인함을 약화시키게 된다.’그는 적법하지 않은 연금청구를 한 남북전쟁 참전 군인들을 위한 민간연금 법안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공화국육군의 압력을 받은 의회가 군복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장애를 입은 장애인들에게도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 역시 거부했다. 1892년 제 24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제정책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나는 올바르기 위해 너무 가혹하게 애를 썼다(I have tried so hard to do right).’라는 유언을 남겼다. 1,000달러짜리 지폐 속 인물이기도 하다.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시정으로‘평화를 이룩한 에드워드’라는 애칭을 받았던 영국 왕:에드워드 7세(1841~1910·69세, 재위:1901~1910·9년):빅토리아 여왕과 부군(父君)인 앨버트 공의 장남이다.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오랜 재위 기간으로 말미암아 60세까지 왕세자로 지냈으며, 21세에 덴마크의 왕녀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나, 평생 여배우와 유부녀 등 여러 정부(情婦)와 풍문을 일으켰으며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 즉위 후에는 주로 외교문제에 주력하여 영국과 대륙 간의 긴장 완화에 기여했다. 그는 하루에 담배 20개와 시가 12개를 피웠다. 1907년, 그는 코 옆에 기저세포암이 발병하여 라듐으로 치료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았다. 1909년 2월 베를린 국빈 방문 중에는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궤양과 기관지염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사망하기 직전까지 병석에서 업무를 보며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니다,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싸워 갈 것이다. 끝까지 싸울 것이다(No, I shall not give in. I shall go on. I shall work to the end)’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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