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시인과 함께하는 시 여행-대추 달이는 날
박정은 시인과 함께하는 시 여행-대추 달이는 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28 12:4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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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시인 경남문협 회원
대추 달이는 날

가을 꽃물 팽팽하던 젊은 날은 가고
햇살 여문 멍석을 털며 일어선 주름투성이 몸 추슬러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은 할머니 볼빛에서
대추가 끓고 있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검붉은 이력들이
가을산 한 비탈을 휘젓던 안개를 피워내며
달게 익어갈 때 삭신을 두드리며 일어난 할머니
메메 돌리라 눋지 않도록 휘휘 돌리며 살다 날 저물면 다들 마른 대추되어 부끄럽지 않느니
대추를 끓이는 날은
할머니의 마른 대추 두어 말이 멍석을 턴다

이제 대추 끓는 소리에
내 눈시울도 붉어질 차례다


(작가 노트)

필자가 기억하는 할머니 모습은 늘 볼이 대추처럼 검붉었다. 소죽을 끓이시느라 군불 앞에 계셨으니 그러셨을 테지만, 늘 양볼은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눈에는 눈물을 머금고 계셨다. 가마솥에 대추를 달이는 날은 한층 더 검붉게 부푸셨고, 옷소매로 눈물도 훔치셨다. 어떤 이가 그리우셨는지, 며칠 전 아버지께 들으셨던 싫은 소리가 섭섭하셨는지, 아니면 군불 연기가 매워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왜 눈물을 흘리시는지 몰랐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던 11월 어느 날,군불을 지피시던 할머니는 아궁이 앞에서 쓰러지시고는 다시는 군불을 지피시지 못하셨다. 붉게 물든 대추를 보면 유난히 붉고 쭈글거렸던 할머니 두 볼이 생각난다. 쭈글쭈글한 대추는 끓이면 끓일수록 팽팽하게 젊어진다. 마치 군불 앞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할머니 두 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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