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솔바람새소리농장 신신호 대표
<8>솔바람새소리농장 신신호 대표
  • 정리 한송학·사진 이용규기자
  • 승인 2013.07.0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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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전 귀농해 10년간 호롱불 켜고 살았다

▲ 신신호 솔바람 새소리 농장 대표는 “귀농은 자신이 좋아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을 생각하고 귀농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1972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시를 향해 떠날 때 배낭하나 메고 산골로 들어온 사람이 있다. 1972년이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해이다. 또한 1972년은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이농현상이 일어났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때이다.
이처럼 세상은 거대한 도시화의 물결이 시작된 때에 거꾸로 도시에서 산골로 찾아든 사람이 있다. 솔바람새소리 농장 신신호 대표(70)는 1972년 서울에서 잘나가는 직장을 때려 치고 산청 지리산 기슭으로 배낭하나 달랑 매고 왔다. 그것도 건설회사라는 잘 나가는 직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랬으니 세상이 그를 어떻게 봤겠는가. “도시에서 미친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신 대표는 미친 사람이 왔다는 소리, 간첩이 왔다는 말, 불치병이 걸렸다는 말 등 안들은 말이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신 대표는 40년을 온 몸을 던져 세상흐름과는 거꾸로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 대표는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쉬고 싶으면 쉬고 참 자유스러워요. 이런 자유 때문에 그 어려운 산골생활을 견뎌낸 것 같아요.” 신 대표는 산골 생활이 오히려 좋았다고 회상했다.
신대표가 경영하고 있는 솔바람 새소리 농장은 행정구역상으로 산청군신안면 외송리에 있다. 외송리는 당시로는 길도 전기도 수돗물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화전민 촌이었다. 둔철산 둔철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둔철마을로 알려져 있는 안봉리와 함께 대표적인 산골마을이었다.
지금의 외송리는 오히려 사람들이 찾는 동네가 되었다. 외송리는 은퇴자들이 주로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와 사는 마을이 됐다. 홍화원에서 둔철마을을 지나 신등까지 둔철로가 개통이 됐기 때문에 교통이 편해졌다. 작년부터는 시내버스도 다닌다.
“마을에 버스가 하루 두 번 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지금은 차로 다니기 때문에 제가 버스를 탈 일은 없지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 거예요.” 신대표의 부인인 이태자 여사는 외송리에 시내버스가 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태자 여사는 평생을 진주에서 생필품을 사서는 배낭에 메고 날랐다고 했다. 그 때 힘들었던 일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지 버스가 들어온다는 소리에 그냥 눈물이 흐른 것.
신 대표의 외송리 농장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10년 전이라고 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호롱불 켜고 살았다고 했다. 그 긴 시간을 호롱불 켜고 책도 읽고 밥도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했다. 
상상이 되지 않는 생활에 무엇이 좋아서 떠나지 못했느냐고 묻자 이유 없이 좋았다고 했다. 산도 좋고 하늘도 좋고 바람도 좋아서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산골에서 아이들 낳아서 다 키우고 40년간이나 살았다. 신 대표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거나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지금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에 오는데 언제나 바쁘다는 말이 입에 붙어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리 바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늘 바빠서 못 온다고 해서 서운하다고 했다. 자연이 좋아 산으로 떠나 온 사람들이 그래도 자식은 자주 보고 싶은 것 같았다.                                                                                     

▲ 신신호 대표가 직접 지은 자택 앞에 선 신 대표와 부인 이태자여사. 부인과는 첫 만남에서 결혼을 결정하고는 생전 처음인 산골로 시집와 여기서 40년을 살았다. 옆의 백목련은 신대표가 이 산에 들어올 때 심은 나무로 나이는 43년 되었다고 한다. 이 백목련이 자신들과 삶을 함께 해 온 신 대표 부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함께 왔던 두 사람 3년 안에 다 돌아가

신신호 대표가 산청으로 오게 된 것은 이웃에 있던 신부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서 신부퇴임을 하고 둔철에 와서 살고 계셨던 장씨 성을 가진 신부님이 있었다. 장 대표는 가끔 산청에 내려와 장 신부님을 만나곤 했는데 “자네는 여기서 살 사람이니 빨리와.”하고 권유를 했다. 인연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이라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 72년도 3월 2일 날 지금의 농장 터 13만평을 사서 들어왔다.
“처음 들어올 때는 2가구가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3년도 안 돼 다 떠났어요. 귀농을 권유한 신부님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신 대표는 함께 온 귀농인 2가구와 귀농을 권유한 신부님은 모두 몇 년 안 돼 외송리를 떠났다고 했다. 신 대표 자신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 방황을 많이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한번 정한 목표를 이루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에는 방황을 하지 않았다.
“지금 귀농은 사치예요. 제가 들어왔던 때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준비를 하고 와야 하는 데 저 같은 경우는 정말 아무 준비 없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이상한 말도 많이 들었죠. 동네에서는 미친 사람 들어왔다고 수군댔어요.”

▲ 신신호 대표는 자신의 농장에 꽃이 핀 헛개나무를 보며 “올해만큼 헛개 꽃이 핀적이 없다”며 “올해는 헛개가 돈이 되겠네”라고 했다. 헛개나무 열매인 지구자는 1kg에 7만원 정도 가는 고급약재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했다. 신 대표 농장에는 16년 된 약 500주의 헛개나무가 있다.
멀쩡한 사람이 산골에 오니 미쳤다는 소리 들어

신 대표는 처음 이곳에 올 때 주변에서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간첩 아니냐는 소리에서부터 불치병이 걸렸다는 말,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 등 수도 없는 말들을 들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주위의 말들보다 힘든 것은 사실 농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해 일하고 있던 사람이 농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배운 것이 소로 쟁기질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농사는 아직 기계화가 되어 있지 않아 소로 농사를 짓던 시절이었다.

“이웃에서 소로 쟁기질을 하는 법과 쓰레질을 하는 법을 배웠어요. 초보 농사꾼이 제대로 할 리가 만무하지만 그래도 농사일을 배워서 골짝에 20마지기 논을 지었어요. 일단 먹는 것은 해결된 셈이었지요.” 신 대표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독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에는 흔들리지 않고 농사일에 매진했다.
신 대표는 20마지기의 논농사를 짓는 것과 함께 본격적으로 산에다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 때 밤나무가 일본에서 신품종이 들어와 밤나무를 심으면 부자 된다는 분위기여서 저도 2000주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못하겠지만 그때는 인건비도 쌌고 때거리가 없어 지내던 시절이라 동네에서는 제구 구세주 같았지요. 20~30명씩 인부를 쓰고 그랬으니까요.”

▲ 신 대표의 오미자 농장. 약 2000평에 달한다. 신 대표는 “요즈음은 오미자의 수요가 많아 물량을 대지 못할 정도”라며 “그러나 오미자를 더 심을 생각은 없다. 지금으로서 충분하다”고 이야기 했다.
처음 심은 밤나무 농사 수확철에 실패

그런데 실패했다.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이다. 나무를 심기는 했지만 수확철이 되니 일꾼이 없는 것이었다. 나무를 심을 때는 농번기가 아니다 보니 일꾼들을 쓸 수 있었지만 농번기가 되니 일꾼이 없는 것이었다. 그 이후 배나무가 잘된다는 소리를 듣고 심었다가 실패하고 복숭아도 잘된다는 얘기를 듣고 실패하고 그랬다.
“과수 나무와는 인연이 없는지 과수나무는 대부분 실패했어요. 농약을 쳐야 하는 데 제때 사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기도 하고 인부를 구하지 못해 나무를 잘 관리하지 못해 실패하기도 하고 실패의 원인도 많아요. 문제는 제가 나무를 잘 몰랐다는 거지요.”
신 대표 농장이 산골인데다 길도 없고 하니 인부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수 농사가 실패했다. 그 이후 시작한 것은 한우사육이었다. 한우 6마리에서 시작해 80마리까지 기른 적이 있는데 한우사육은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한우를 여기에다가 방목을 해서 키웠어요. 원래는 많이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6마리에서 시작한 것이 80마리까지 늘어난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한우사육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한우사육도 힘이 없어서 안하고 있어요.”

▲ 신 대표 농장의 들메나무. 멸종위기에 처해 보호수종으로 지정됐다. 어린순은 들미순이라 부른다. 신 대표는 “들미순은 나물로서는 최고로 쳐 어른들이 두릅 팔아 들미 사먹는다는 말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
한우 사육 성공으로 점차 산골생활에 적응돼 가

신 대표는 한우사육이 성공하면서 점차 산골에 적응을 해 갔다. 지금까지 산골에 들어와 병원에 간 것은 2번뿐이라고 했다. 농약중독으로 2번 병원에 간 것 빼고는 아직까지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적은 없다고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건강을 타고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점차 외송리 농장에 적응을 해가며 아이 키우고 일하는 재미에 세월이 가버렸다는 게 신 대표의 회상이었다.
신 대표는 이렇게 논농사 밭농사와 소를 키우면서 전형적인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변해 약초가 점차 대세가 되어가는 시대가 왔다.
“사실 논농사와 밭농사 그리고 소를 키우는 일은 힘이 많이 들어요. 젊었을 때는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보다 전문적인 농사로 방향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산청군에 약초바람이 분 겁니다. 그래서 아 이거구나 생각하고 그때부터 약초농사 위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약초는 종목만 잘 선택하면 매년 씨 뿌리고 수확하는 논농사나 밭농사 그리고 과수농사에 비해 노동력은 적게 들고  소득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대신 농사를 짓는 지식이 더 중요해 집니다.”

▲ 신대표 농장에서 재배하고 있는 택란이라는 약초. 신 대표는 “택란은 초석잠과 함께 치매예방을 돕는 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10년 전부터 약초 시작…지식이 필요한 농사

지금 신 대표는 오미자 2천평, 헛개나무 500주, 황기 100평, 초석잠 200평, 더덕 300평 정도를 재배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다 자체적으로 판매한다. 생으로도 팔고 말려서도 팔고 효소를 만들어서 팔기도 한다. 어디서 듣고 오는지 언제나 물량이 모자란다는 게 신대표의 고백이다. 신 대표는 또 재배한 것 뿐만 아니라 산골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솔잎, 쑥 등을 이용해 효소를 만들기도 한다. 신 대표는 사실 이런 자연에 널려 있는 것이 우리몸에 좋은 것이 많다고 했다.
“지금까지 약초농사를 지으면서 판매를 위한 홍보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매년 약초축제에 가지고 나가서 파는 것 이외에는 집에서 다 팔아요. 어떻게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 사 갑니다. 특히 둔철에 길이 나고부터는 관광객이 늘어나 차 타고 가다가 들어와 사기도 해요. 매년 물량이 딸렸으면 딸렸지 모자라지는 않아요.”
신 대표는 최근 들어 오미자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했다. 5년 전부터 오미자 바람이 불더니 매년 그 수요가 늘어난다고 했다. 신 대표는 오미자는 생으로도 팔고 말려서도 팔고 엑기스로 만들어서도 판다고 했다. 생으로는 kg당 1만2천원을 받는다. 그리 비싸게 받지는 않는 것 같았다.
엑기스는 재배한 것 보다는 산에서 나는 것을 많이 담는다. 솔잎엑기스는 매년 만드는 데 매년 매진돼 남는 것이 없다. 솔잎은 산에 있는 것을 따는데도 그게 그리 쉽지 않다고 했다. 쑥도 산에서 나는 것으로 엑기스를 담고 매실은 재배를 하는 데 농약을 치지 않고 비료를 주지 않으니 야생과 같다고 했다. 매실도 1톤을 넘지 않을 것 같은데 매년 매진된다고 했다.

▲ 신 대표 농장의 초석잠. 신 대표는 아이들 뇌를 발달 시키고 어른들 치매예방에 좋은 약성이 있는 약초라고 말했다.
연간 5천만원 소득 더 벌수 있지만 부족하지 않아

예전에는 인부를 대서 약초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부부 2명이서 한다. 부부 2명이서 농사지어서 연간 5천만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
“지금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 부부 2명이서 할 수 있는만큼만 합니다. 그래도 연간 5천만 원 정도의 소득은 올립니다. 소득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지만 그러면 제 자유로운 생활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이 70에 연간 5천만 원을 벌면 대한민국에 이만한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신 대표는 귀농하는 후배들에게 큰 돈 벌려고 귀농하려면 오지 말라고 강하게 이야기 했다.
“큰 돈 벌려고 귀농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말리고 싶어요. 도시에서처럼 행동하기 십상이예요. 그러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 누구도 그렇지만 자기가 좋아서 해야 합니다. 저는 평생 제가 좋아서 한 일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도 좋아요. 저처럼 농촌이 좋아서 산이 좋아서 와서 하다보면 방법이 생깁니다. ”

▲ 신 대표 농장의 천문동. 신 대표는 천문동은 천식, 기관지에 좋은 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뿌리가 맥문동과 비슷하다고 했다.
큰 돈 벌려고 귀농하지 마라 반드시 실패한다

신 대표는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좋아서 하다보면 다 먹고사는 길이 생긴다고 했다. 자신은 아무 경험도 아무 정보도 지식도 없이 산에 들어왔지만 여기서 애들 낳아서 다 키우고 평생 먹고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귀농을 해서는 반드시 동네사람과 신뢰를 쌓아야 하는 것도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신 대표 자신은 41년간 산청에 살면서 이제 산청사람이 다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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