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분기별 100가구에 쌀 1포대·라면 1박스 보내
매년 분기별 100가구에 쌀 1포대·라면 1박스 보내
  • 글/배병일・사진/이용규기자
  • 승인 2014.01.2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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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살기운동 중앙동 위원회 김금화 부위원장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정혜은 회장(바르게살기운동 진주시 중앙동 위원회 위원장)이 강제로 끌고 와서 하게 됐다”며 인터뷰 장에 들어선 김금화 바르게살기운동 진주시 중앙동 위원회 부위원장은 “신문에 날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과장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어색한지 연신 “자랑할 일이 아닌데. 봉사는 숨어서 해야 되는데. 신문에 날만한 사람이 아닌데…”를 되풀이 했다. 정말 김 부위원장은 자신의 기탁봉사가 신문에 나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한 것 같았다.


김금화 부위원장은 10년째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단체기탁봉사를 하고 있다. 단체 기탁봉사란 자신이 기부하고 싶은 바를 단체에 얘기하고 돈을 기부하면 그 단체에서 대상자를 선정해 기부물품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김 부위원장은 지금까지 매년 1000만원 이상, 기탁해 오고 있다. 분기마다 100가구에 쌀 한포대기와 라면 한 박스를 보내는 금액이다. 이렇게 매년 1000만원씩을 기탁봉사를 해 오고 있지만 김 부위원장의 가게가 장사가 잘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번 맛들인 봉사에 대한 인연을 끈을 놓지 못하고 계속 이어가고 있다.

김금화 부위원장은 사천시 용현에서 4대째 정미소를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지냈다. 결혼 전까지는 세상이 그리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결혼 후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때 거리가 없을 정도로 어려움도 겪어 보았던 김 부위원장은 10년 전에 사천에서 진주로 와서 장대동에 자리 잡았다. 당시 장대동이 유흥가로서 호황을 보이고 있던 시절이었다. 장대동에서 유흥주점을 개업했는데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진주사람 아니라고 홀대도 많이 받았고 보이지 않는 벽도 많이 느꼈다. 그래도 장사가 그리 나쁘지는 않아 밥은 먹고 살만했다. 그러자 “타지에 와서 먹고살게 되었는데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이라 주민센터를 찾아가 뜻을 밝혔더니 고맙다며 기탁봉사를 추천해 주었다. 당시는 기탁봉사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기탁봉사가 벌써 10년째이다. 그 10년 동안 완전히 망해서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던 적이 있었지만 기탁봉사를 멈추지는 않았다. “기탁봉사란 것이 한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보람이 커요. 그래서 제 밥은 먹지 못해도 기탁봉사를 중단한 적은 없습니다”

김 부위원장은 지난해에는 바르게살기운동 진주시 중앙동 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정혜은 위원장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원래 김 부위원장은 단체에 가입하거나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봉사활동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정 위원장의 성화에 못 이겨 바르게살기운동 중앙동 위원회에 입회를 하게 됐다. 입회를 하자 부위원장을 맡으라 해서 평생 인연이 없던 감투도 쓰게 됐다. 이런 인연으로 지금까지 주민센터를 통해 진행하던 기탁봉사를 바르게살기운동 위원회를 통해서 계속하고 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제가 국수를 잘 끓이는 데 나이 들면 국수집 내어서 막걸리와 함께 드시고 싶은 분은 마음껏 드시도록 봉사하는게 제 꿈입니다” 다음은 김금화 바르게살기운동 진주시 중앙동 부위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무슨 일을 하나
▲진주시 장대동에서 유흥주점을 운영하고 있다.

-요즈음 경기는 어떻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주점도 불황이다.

-주점을 하게 된 것은 얼마나 됐나
▲18~19년 됐다.

-진주시에서 시작한 것은 얼마나 됐나
▲10년 전에 장대동에서 시작했다.

-그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가정주부였다.

-단체 기탁은 언제부터 했나
▲10년 전 장대동에서 주점을 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하게 됐나
▲진주는 텃세가 심했다. 고향이 사천이라도 진주사람 아니라고 자리를 잡는데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힘들게라도 진주에서 돈을 버니 진주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주민센터를 찾아갔더니 기탁봉사를 하면 된다고 추천해서 시작했다. 당시는 기탁봉사의 의미도 몰랐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벌써 10년째이다.

-기탁봉사라는 게 어떤 것이냐
▲단체에 기탁하고 싶은 바를 이야기 하고 돈을 주면 단체에서 물건을 사서 당사자들에게 대신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어디에 기탁했나
▲주민센터에 기탁하면 주민센터에서 선발해 보내준다.

-무엇을 기탁했나
▲가구마다 쌀 한포에 라면 1박스를 보내달라고 했다.

-얼마정도 기탁했나
▲한번 할 때 100가구를 선정해 기탁해 달라고 했다.

-지금은 어디에 기탁하나
▲바르게살기 중앙동 위원회에 가입한 이후에는 바르게살기 중앙동 위원회에 기탁한다.

-연간 얼마정도 기탁하나

▲100가구에 분기별로 살 한포대기 라면 1상자를 줄 수 있는 금액을 기탁한다.

-연간 얼마나 되나
▲1000만원 정도 된다.

-1000만원이면 유흥주점을 해서 버는 돈으로는 적지 않은 돈 아닌가
▲적지 않은 돈이다. 그렇지만 벌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기탁한다. 그런데 기탁봉사는 한번 시작하면 빠져들게 된다.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일이다.

-10년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나
▲그렇다. 10년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10년 동안 영업이 어려웠던 적 없나
▲때 거리가 없을 정도로 어려웠을 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진주에 와서 2번 실패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워도 기탁봉사는 중단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실패했나
▲7~8년 전에 주변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완전히 망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집에 쌀을 두되 사오면 그날 다 먹어버릴 정도로 식구가 많았다. 저는 촌 출신이라서 밥을 많이 먹는데 밥을 먹지 못한 적도 있다. 그래도 봉사는 쉬지 않았다.

 

 

-어떻게 다시 회복했나.
▲회복도 주변사람들 도움으로 회복을 했다. 주변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망해보기도 주변사람들 도움을 받아서 성공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주변사람들을 좋게 생각한다.

-지금은 괜찮나
▲지금은 먹고는 살만 하지만 그래도 빚은 있다. 빚이 있어도 봉사를 그만둘 수는 없다. 봉사도 중독이 된다.

-참으로 대단하다. 봉사를 해서 도움을 받은 적도 있나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어떤 때인가
▲유흥주점을 하다 보니 민원이 발생하는 때가 있다. 한번은 어떤 곳에서 고발을 해서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는데 할머니 500명이 “김금화는 그런 사람 아니다”고 진정서를 내 주어서 쉽게 해결된 적이 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데 할머니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제 편을 들어주어서 쉽게 해결됐다.

-기탁봉사 외에 다른 봉사는 무엇을 하고 있나
▲바르게살기 중앙동 위원회를 통해 매월 둘째 화요일에 경로당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딸과 함께 참여해 봉사하고 있다. 딸과 함께 봉사하면서 딸에게도 봉사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보람 있다. 딸도 봉사 일을 해 보고는 계속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유등축제 저지운동에도 기부했다고 들었다.
▲지난해 서울등축제 저지 운동시 장애인단체가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서울에 시위하러 간적이 있다. 이때 버스 1대 운임을 제가 부담했다.

-왜 그랬나
▲유등축제는 진주의 고유한 축제인데 서울에서 빼앗아 가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으로 기부하게 됐다. 마침 서울등축제가 저지되어서 저도 한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앞으로 어떤 분야의 봉사를 할 생각인가
▲정부가 복지정책으로 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다. 정부의 기초생활 수급대상자가 되려면 자식이 없어야 하고 자기 집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자식이 있어도 없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다. 또 자기 집이 있어도 저당이 잡혀있어서 실제 없는 것 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기준상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정부도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고 싶다.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바르게 살기운동 중앙동 위원회는 언제 가입했나
▲중앙동 위원회는 과거 봉수동, 옥봉동, 중앙동이 합쳐져서 중앙동이 된 것이다. 정혜은 위원장이 책임을 맡으면서 함께 일을 하자고 해서 가입하게 됐다.

-바르게살기 위원회에서는 어떤 봉사를 하고 싶나
▲무료급식 봉사를 하는데 제가 해 보니까 오는 사람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급식소까지 오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하고 싶다. 몸이 불편해서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료급식소 조차 찾아올 수 없다. 또 생선장사를 하던 사람이 무료급식소에 오면 냄새난다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도시락을 배달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나
▲인간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 아니겠나. 저는 지금도 손톱 밑에 때가 있는 사람들 보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난다. 제가 국수를 잘 끓인다. 제가 국수집해가지고 막걸리 통 하나놓고 국수 먹고 싶은 사람들에게 국수와 막걸리 한잔씩 나눠주면서 사는게 꿈이다. 글/배병일・사진/이용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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