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還鄕女)
환향녀(還鄕女)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5.1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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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으로 만주 땅에 끌려간 조선인 남녀의 수는 60여만 명으로 대부분이 곱고 나이 어린 규중처녀들과 사대부가의 내당 마님들이었다. 인조 16년 3만 여명이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던 사대부집 여자들을 돈을 쓰거나 줄을 대서 서울로 되돌아오게 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이 ‘환향녀’라는 말이 시간이 흐르면서 ‘화냥년’이라는 비속어가 된다.


때로는 도중에 청나라 병정의 눈을 피해 몰래 도망쳐오면서 갓을 쓰고 남장을 하고 돌아오니 이를 두고 또 ‘갓쓴이 아이’라 불렀는데 뒷날 ‘가스나이→가시나’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 이미 오랑캐에게 더럽혀질 대로 더렵혀진 부인을 다시 맞아들여야 하는 조정의 고민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심양에서 돌아온 기혼 여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대부가에서 돌아온 처첩들을 화냥년이라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장유도 속환되어 돌아 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름 있는 사대부가에서는 모두 장유와 뜻을 같이 하였다.

여인의 절개가 도덕의 척도로 평가되던 시대, 설사 그것이 전란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더럽혀진 여인들에게는 오직 화냥년이라는 치욕의 굴레가 씌워질 뿐이었다. 버림받은 여인들은 죽어 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목을 매고 죽었고, 더러는 강물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길가에는 여인들의 주검이 즐비하였다.

최명길과 인조는 환향녀에 대한 대책을 세워, 각 고을에 있는 강을 지정하고, 정해진 날에 환향 녀들로 하여금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는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리기로 했다. 교지 내용은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 홍제동(弘濟洞)의 유래
서울 근교에는 4원(홍제원 보제원 이태원 전관원)이 있었는데 홍제원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며 예복을 갈아입었던 곳으로, 인조는 영을 내려 “홍제원의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노라”하였다. 돌아 온 여자들의 정조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가 있으면 엄벌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심양으로 끌려간 우리의 소녀, 아녀자들이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나라가 힘이 없어 끌려가 어릴 때는 성노리개로 늙어서는 노예로 더 늙으면 활받이로 억울하고 한 맺힌 생을 마쳐야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몽고 침입, 임진왜란 때도 처참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耳鼻 이비야 즉 코와 귀를 배어간다는 말로 어릴 때 어른들께서 위험한 일을 할 때 이비이비를 했다.

그 아픈 상처가 사천조명군총(泗川朝明軍塚)에 남아 있고 그 옆에 이총(耳塚)이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일본은 위안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중국은 우리의 상고사를 왜곡 조작하고 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지면 역사도 문화도 강대국의 아류로 왜곡되어 살아진다. 하루빨리 대한민국의 위대했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국혼을 부활하여 세계 정신지도국으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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