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피는 사월의 단상
보리 피는 사월의 단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4.1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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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노인회 사무국장

4월 첫 주 일요일 아침이다. 계절로는 분명 봄이건만 아직도 꽃샘추위가 제법 쌀쌀하여 옷깃을 여미게 한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 운동 길에 나섰다. 집 옆으로 비슷 틈이 내려앉은 야산 모롱이를 돌아 못 둑 위를 걷다가 바로 앞 양지바른 곳에 있는 작은 보리밭으로 시선이 갔다. 보리가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은 채 탐스럽게 피어 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보리가 며칠 전부터 짙푸른 색깔로 생기가 도는가 싶더니, 그새 하얀 보리 이삭을 내밀고 있는 게 신기하다.


아직 아침으로는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보리가 핀 것을 보니 봄의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왔음을 실감케 한다. 예전에 어른들로부터 흔히 ‘보리 안 피는 사월이 없다.’라는 말을 흘러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말은 아무리 혹독한 겨울을 지내더라도 사월이 오면 봄이 되고, 보리가 핀다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런 아침 추위는 초여름까지도 계속된다. 그래서 ‘보리누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도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 마을은 읍 소재지 근교에 있어 그런지 이제 보리농사를 짓는 농가가 한집도 없다. 예전에는 벼농사 못지않게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차츰차츰 줄어들더니 수년 전부터는 아예 한집도 짓지를 않는다. 80연대까지만 해도 절대 부족한 식량 때문에 정부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보리쌀을 홍보하고 보리농사 기술보급에도 열을 올렸는데, 지금은 보리가 완전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곳 손바닥만 한 밭에 해마다 보리를 심는 할아버지는 올해 여든두 살 되신 분이다. 이 할아버지가 매년 이곳에 보리를 심는 것은 예전과 같이 식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술 재료인 ‘질금’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리를 해마다 이곳에 심는 또 다른 깊은 뜻을 나는 알고 있다. 언연 중에 나한테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심어오며 식량으로 큰 대접을 받던 보리가 살기가 좋아지자 천대를 받고 있다며, 그 종자가 없어질까 봐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보리를 심어 종자를 보전하고, 보릿고개 시절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못 둑에서 보리를 내려다본다. 싱그러운 보리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짙푸른 보리 잎 속에 하얗게 피어있는 보리 싹을 보면서 한 토막의 추억이 밀물처럼 다가온다. 어린 시절, 보리가 피기 시작할 때면, 그때도 온 산에 진달래가 함께 피었고, 이어서 양지바른 잔디밭에는 삐삐가 쏙쏙 솟아나고, 찔레나무 밑에는 살이 오동통한 찔레 순이 돋아나 모두 우리들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지금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그런 것을 어떻게 먹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보릿고개 시절 우리에게는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그러다가 날씨가 차츰 따스해지고 보리가 영글어 가면 그 위를 벌 나비들이 훨훨 날아다니고, 종달새가 지저귀며 창공을 날랐다. 어릴 적 한때는 멋모르고 그 풍경이 마냥 즐거웠지만, 조금 더 자라 보릿고개의 어려움 속에서 부모님이 하시는 농사일을 거들면서부터는 보리는 나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애물단지였다. 겨울부터 봄까지 그 추운 날씨에 손발이 트 가며 몇 차례씩 보리논의 잡초를 매야 했고, 틈만 나면 보리논에 나가 보리를 밟아 줘야 했다. 또 보리가 필 무렵이면 대다수 농가에서는 지난가을에 거둔 양식이 떨어져 쑥이나 봄채소에 쌀을 조금 넣고 끓인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보리가 누렇게 익으면 온 식구들이 매달려 보리를 베고 말려서 타작을 하는데, 덥덥한 날씨에 그 일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벤 보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져다 날라야 하고, 마당에 펴놓고 땀범벅이 되어 도리깨 타작을 해야 했다. 이때가 되면 햇감자도 함께 수확을 하는데, 때로는 감자나 보리를 주고 아이스케이크(얼음과자)도 사 먹고, 빵도 사먹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사먹은 얼음과자와 빵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못(池) 바로 옆 야트막한 산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진분홍 진달래가 두꺼운 이불을 깔아 놓은 듯 두툼한 무리를 이루며 만개해 있다. 그 모습이 못물 속에 비쳐, 마치 화려한 용궁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인근의 과수원을 바라본다. 분홍빛 복숭아꽃과 하얀 배꽃이 이슬을 머금고 탐스럽게 피어 있다. 마을 골목 곳곳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고 뒷산 골짜기에도 산 벚꽃들이 마치 푸른 천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꽃 천지다. 온갖 꽃들이 수놓는 봄의 향연이 너무나 황홀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 이 봄이 지나면 만물이 싱그러운 여름과 결실의 계절 가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무한한 능력에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이렇게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 이 강산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산다는 게 큰 행운으로 생각된다.

주위에서 차츰 보리농사가 사라진다. 얼마 안 가 보리종자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농민을 힘들게도 했지만, 한때는 우리를 먹여 살렸고, 우리와 친숙했던 고마운 보리가 인간들의 배신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화단에라도 보리 몇 포기를 심어 꽃같이 가꾸며, 추억의 끈을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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