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역사탐방 기행문
대마도 역사탐방 기행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2.01 18:2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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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제/독도지킴이 세계연합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
 

대마도는 ‘지리학적, 역사학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임에 틀림없다.

아베정권의 일본이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대마도를 지키기 위한 속셈이 있다고들 한다.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는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고 먼저 이종무 장군이 1419년 6월 19일 대마도를 토벌한 그날을 회상하며 경상도 계림땅 대마도로 떠나보자.

동해를 찾아오는 서명운동 등을 통해 우리땅을 지키는 민간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해야하는 사명을 가지며 현재 필자는 ‘(재)독도지킴이 세계연합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으로서 밴드회원 1000여명, 페이스북 5000여명 등 회원들과 “독도는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을 외치며 많은 자료를 공유하면서 운영해오고 있다.

‘대마도 역사탐방단’을 운영하기 위해 1진으로 본부 임원진의 일정이 정해졌지만 메르스의 한파로 취소되면서 아쉬움이 많았다.

아쉬움도 잠시, ‘독도ngo포럼’에서 ‘대마도탐방단’을 구성하여 대마도 탐방 일정이 정해졌다.
총 2박3일의 일정 중 먼저 통영의 국도를 선택했다.

지난 7월 6일(월) 삼덕항(광포항)에서 출발해 뱃길로 1시간 남짓 가다보니 국도항이 나타났다. 수국 등 각종 꽃들과 멋진 경치를 만끽하며 1시간 오르다보니 정상이 보였다. 대마도가 눈에 보인다하기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안개가 짙어 희미한 수평선의 여운만 남았다.

국도는 유배지로서 고려말 설훈장군이 지명을 명명하였다고 한다. 대마도와 인접한 최남단의 섬으로 간첩선 침투가 빈번하였고 공해상 중요한 군사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다음날인 7일 대마도로 출발하는 아침이 밝았다.
밤새 내린 비로 출항여부에 촉각을 세우며 대마도로 출발했다.
드디어 대마도다. 우리의 땅! 대마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조건이지만 한국전망대로 향했다. 최북단에 위치하여 부산과의 거리가 49.5㎞로 대한민국의 땅임을 실감나게 한다. 전망대 옆에 역관사조난추도비가 있다. 조선통신사 기착지로 역관과 그 일행들이 배가 침몰되어 전원이 사망하여 추도비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천으로 인한 기상악화로 부산을 볼 수 없었지만 전망대에 올라보니 지척에 있는 우리영토임에 분명한 사실을 확인했다.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에 있다는 박재상순국비 참배는 얼마 전 불상도난사건으로 방문이 불가 통보를 받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또한 1419년 이종무 장군이 거제를 출발하여 대마도를 토벌한 곳을 수소문하였지만 아소만 일대라는 사실 외에는 정확한 장소를 아는 이가 없어 다음 여정길에 발길을 옮겼다.

다음 장소는 미우다해수욕장이다. 100대 해수욕장에 속한다는 미니해수욕장이다.
국내에 있는 해운대 광안리 해수욕장 등과는 달리 물이 차갑고 한적하다.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해변으로 에메랄드 색상의 바다는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해수욕장 안에는 거대한 화석바위에 소나무가 살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상징이라 대마도가 우리땅임을 보여준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좁은 숲속 길을 한참동안 가다가 비바람을 맞으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다보면 ‘에보시다케 전망대’에 도착하게 된다.

360도를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아소만은 겹겹으로 이어지는 산 바다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 라이스식 해안의 조용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 곳에서 임진왜란을 준비하기 위해 대마도 주민을 앞세워 본토에서 군대를 이동시켜 은밀하게 장기간 훈련하였고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발길을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신사같은 곳이 보인다.
왜놈들이 모시는 신이 천여개가 넘는다고 하니 신사도 자주 눈에 뛴다.

와타즈미신사로 발을 옮긴다. 와타즈미신사는 히코호호테 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를 기리는 해궁으로 바닷가 신사중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용궁전설이 있다.

본전 정면의 5개의 문 중, 2개가 바다속에 세워져 있어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여 먼 옛날 신화시대를 연상할 수 있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별로 방문하기는 싫었지만 지피지기라 했던가!
우리땅에 그들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도 탐방의 중요한 일부분이라 사료된다.

첫날의 마지막 일정은 만관교로 항한다.
대마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러일전쟁을 대비해 구)일본 해군의 군함 출입을 위해 인공운하를 만들면서 두 개의 섬이 되었다. 대마도에 거주했던 많은 선조들이 운하건설에 투입되어 사망하였다니 숙연할 뿐이다.

지금은 대교를 건설해 상대마, 하대마를 연결하고 있다.

우중에 연세드신분과 여성분들이 고생한 하루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저녁식사와 평가회를 끝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밤새도록 내린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탐방단 일정의 마지막 날이라 마음이 바쁘다.

조선통신사 역관으로 대마도에서 조엄 선생이 고구마를 조선으로 가져왔다는 흔적을 찾기위해 고구마박사 정병춘 일행과 함께 빗길을 재촉했다.

‘백제의 은행나무’가 위용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1500년 역사의 백제에서 전해졌다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백제에서 전해진 사실은 삭제하고 일본의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왜곡하고 있다.

다음 발걸음은 대마도 최남단의 대한해협을 바라보기로 했다.
대마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쓰쓰자키는 대한해협과 경계를 이루고 수로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조망되는 풍경은 그 절경을 자랑하며 등대에 부딪히는 파도는 자연의 장대함을 느끼며 대한해협을 바라보는 감회가 새롭다.

역사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碑)가 눈에 들어온다.
선조 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한 사행단(使行團) 467명을 시작으로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 두었다.
대마도에는 이곳 외에 수많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대마도번이 조선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100만냥(약 5580억)이나 되었다고 한다.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한다는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1811년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로 이동한 고관들이 묵었던 임시 주택이 있었던 곳이 대마도에 13개가 있다.

막부접우지(비석)- 이즈하라 거리 군데군데 있다.

마지막 통신사가 역지빙례(易地聘禮)에 의하여 본토에 입국하지 않고 대마도에 머물 때 ‘조선통신사와 막부가 머물렀던 집’이라는 표시라고 한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학교 한편에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있다.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 덕혜옹주와 소다케유키는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길을 건너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수선사에 모셔있는 ‘최익현 순국비’를 찾아간다.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하여 굶었다.

장례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유지들의 힘을 모아 수선사에 순국비를 세웠으며 비 뒤편에 누군가 심어놓은 무궁화 꽃이 선생의 애국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마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왜놈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대마도를 지키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날을 계기로 독도수호와 대마도환수를 위한 각오를 다지며 2박3일의 독도역사탐방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함께한 독도ngo포럼 일행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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