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문화콘텐츠 최치원 선생 발자취 곳곳 서린 합천
한류문화콘텐츠 최치원 선생 발자취 곳곳 서린 합천
  • 합천/김상준기자
  • 승인 2015.12.10 18:52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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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농산정·학사대 등 최치원 유적 활용한 관광콘텐츠 개발 필요
▲ 합천 가야산 해인사 소리길
▲ 고운 최치원선생 영정

합천의 가야산에서 마지막 생을 보냈다고 알려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를 인용하며 천년 전 선생과의 인연을 불러냄으로써 한-중 우호와 문화교류의 아이콘으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합천에는 학사대, 농산정, 독서당, 월류봉 등의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있지만 아직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야산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
신라말 벼슬을 버리고 합천 가야산 일대에 한동안 머물다가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췄다는 최치원 선생의 농산정(籠山亭)과 재실(齋室)이 고즈넉이 서 있는 홍류동은 그 계곡 따라 십리길에 늘어서서 하늘을 떠받들 듯 솟아 있는 키 큰 홍송 밑으로 봄철에 시작해 여름끝자락까지 은행나무 벚나무들이 눈부시게 푸른 터널을 이루며 싱그러운 녹음(綠陰)의 향취(香臭)에 젖게 하는 곳이라 누구나 이곳에 오면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에 들어서는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오면 이곳에서 펼쳐지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아름다운 풍광이 계곡물을 붉게 물들인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홍류동(紅流洞)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토황격소문(討黃檄巢文)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풍류객 고운(孤雲)최치원 선생이 고국에 돌아와서도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전국의 산과 바다와 강을 따라 주유(周遊)하다가 이곳 홍류동에 들러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종착지로 머문 곳이다. 그가 이곳에 머물며 시끄러운 세상의 온갖 시비(是非)를 흐르는 벽계수(碧溪水)에 씻고 청산을 벗삼아 살다가 신선이 되어 가야산에 사라졌다는 설화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전(口傳)되어 전해지고 있다.

 

▲ 가야산 녹산정

◆농산정과 고운암
신라말 효공왕 8년(904) 해인사 화엄원에서 집필하면서 피난 겸 신병을 치료하고 있던 고운 최치원은 마침내 가야산을 은둔처로 삼고 가족을 데리고 와서 여기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농산정 건너편에 차원대 혹은 제시석(題詩石)이라고 불려지는 석벽에 유명한 고운의 둔세시 칠언절구 한수가 새겨져 있다. 난세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읊었던 시인데 농산정 건너편 바위에 초서에 가까운 행서로 깊게 음각하여 전해오고 있다.

“광분첩석 후중만 인어난분지척간 상공시비성치이 고교유수진농산(狂奔疊石 吼重巒 / 人語難分咫尺間 / 常恐是非聲致耳 / 故敎流水盡籠山) - 미친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 행여나 세상시비 귀에 들릴까 /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후세에 정자를 세워 위 시의 끝 두 글자 籠山 이라는 것을 따와 정자 이름을 籠山亭이라 편액을 붙였다. 농산정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며 현재의 건물은 1936년경 그 형적만 남아 있던 것을 후손과 지방유림의 협조로 복원공사를 하였다. 1990년 1월에 경상남도에서 문화재로 지정(문화재자료 제172호)하여 이듬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 평면에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주변 경관에 조화되는 단아한 정자이다. 좌측의 암석위에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라 새긴 비석이 있다.


한편 선생이 살던 초막골 이라는 고운암은 백련암의 맞은편으로 전망이 아주 좋다. 선생의 자(字)를 따서 고운암이라 하였다. 또한 최치원 선생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와 살던 곳을 치원촌(致遠村)이라 하였는데 후에 치인촌(治仁村)이 되고 다시 지금의 치인리가 됐다.

 

▲ 합천 해인사 길상탑(陜川海印寺吉祥塔)

◆해인사의 길상탑과 학사대
해인사 일주문 가기 전 위치한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간 이탑의 내력을 알지 못하였으나 지난 1965년 본탑중에서 발견된 최치원 선생이 지은‘해인사 운양대 묘길상탑지’에 의하면 신라진성여왕 9년(895)을 전후해 7년간에 걸쳐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들을 위해 당시 해인사의 대덕 훈혁스님이 농촌으로 다니면서 벼 한 단씩을 희사시켜 군량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는 이 삼층석탑을 세웠으니 이는 오로지 전란에 죄없이 목숨을 잃은 고혼들의 명복과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세우게 됐는바 조각담당은 난교스님이었고 탑의 높이는 13척, 소요물품은 황금 3푼, 수은 11푼, 동 9정, 철 260칭, 탄 80석, 벼 20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

학사대는 해인사 경내 팔만대장경판고 옆에 있으며 최치원과 관련된 문헌기록‘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1757년경 후계목을 식재한 기록 ‘백불암집(百弗庵集)’도 남아 있어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된다.

최치원이 신라의 국운은 점차 쇠퇴해가고 고려는 장차 흥할 것으로 예측하고 신라의 재흥을 위해 왕에게 올린 서중에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란 구절에 대해 왕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그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운은 충신은 불사이군 이라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처자를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와 바깥소식에 귀를 막고 고요히 지내기로 결심했다.

여기에 앉아 신라의 말운을 개탄하면서 거문고가 튕기던 곳으로 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살아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높이 19m, 둘레 5.5m로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제5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년이 지난 지금, 한류문화콘텐츠로 부활한 고운 최치원
2016년 중국인의 한국방문의 해를 대비한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 도시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고운’트레일 구성으로 유적답사 프로그램운영, 다양한 관광상품개발 등 공동사업 추진을 위해 올해 7월 23일 출범한 ‘고운’ 최치원 선생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 제3차 실무협의회가 9월 22일 합천군 박창권 부군수, 경주시 김남일 부시장 등 10개 자치단체 부단체장 및 담당과장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천 청와대 세트장에서 개최됐다. 또한 지난 25일 합천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합천문화원, 합천 향토사 연구소를 주축으로 한 ‘고운 최치원 선생 학술대회’가 열려 군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합천지역에서도 최치원에 대한 연구가 첫 발걸음을 내딛은 만큼 앞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보냈던 합천에서의 삶과 활동에 대한 학술적, 문화적인 접근이 좀더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합천의 최치원 유허, 유적, 한시, 설화 등을 이용한 다양한 선양사업과 관광콘텐츠 개발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합천/김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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