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05 16:12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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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작시 청탁을 했습니다
가타부타 답이 없이 그는 점심이나 하자고 했습니다

아직 꽃 오지 않아 바람이 찼습니다

그는 냄비 속의 조린 무를 찾아 고봉밥 위에 올려 주며
시는 나중에 줄 수 있겠다, 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막내딸 이야기와 새로 배우는 동시 이야기도 했습니다

며칠 지나 출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툭, 툭, 돌멩이를 차며 걷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봄이 지나도 이월이 가지 않았습니다

(김병호, ‘이월’)

작가는 대학의 교수면서 유명한 잡지사 편집주간으로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 삶에 대한 활력이 넘치는 시인이다. 작품은 어느 날 어느 시인에게 원고를 청탁하러 간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느 시인들처럼 흔쾌히 승낙하리라 생각한 시인의 생각과는 달리 선(禪)문답하듯 말없이 점심이나 같이하잔다. 입춘이 벌써 지난 이월이라 아직도 바람이 차가운 것이 우수에 찬 작가의 쓸쓸한 마음과 대비되고 있다.

청탁하는 작가에게 고봉밥을 해주고 조린 갈치가 아닌 무를 올려 주는 것으로 볼 때, 시인의 소박한 차림처럼 따스한 사람의 정은 가득 할 것 같다. 그런데 작가에게 시(詩)를 바로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막내딸 이야기며 특히 새로 동시(童詩)를 배운다고 하는 부분에 와서 시인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은 지점에 와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즉, 원고 청탁을 위해 찾아온 손님에게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황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지만, 이런 경우는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막내딸이 대학생이 되었다면 나이 또한 지긋할 것으로 보이는데, 동시를 배운다? 이 부분에서 불현듯 전혀 해당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것은 왜일까? 세상을 어느 정도 바로 볼 수 있는 나이에 든 시인이 동시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그간의 삶을 반추를 하고 있다거나 생의 결승점에 도달하여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삶에서 달관의 경지에 들어선 경우랄까, 하여튼 무거운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원고 청탁을 했던 시인은 출가하여 속세를 떠나 성세(聖世)를 향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독자는 물론 작가 자신도 잘 모른다. 다만 쓸쓸했던 시인의 뒷모습을 떠올리던 작가에게는 시인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담아 두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시인이 왜 출가를 했는지에 대한 명쾌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 것은 곧 새봄이 찾아올 이월임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쓸쓸해 보이는 시인의 모습에서 궁금증이 더해진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성찰의 시간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성찰의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달라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속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같은 사실을 두고 사람마다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폴 발레리(Paul Valéry)가 “나의 시는 독자들이 부여하는 의미를 지닌다”라고 말했듯이, 이 시는 작가의 의도를 떠나 다양한 독자들에게 다양한 추측을 낳게 하는 의미를 부여받게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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