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손지갑에서 더위가 쏟아진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손지갑에서 더위가 쏟아진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19 13:2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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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손지갑에서 더위가 쏟아진다

성당 길 도로변에서 한 남자가 성화를 팔고 있네요
백열의 사랑에 관해서라면 나는 아는 바 없다는 표정이지만
가슴에 화살이 박혀 죽어가는 액자 안의 수호성인은
고통보다 아름다운 몸을 가졌습니다

처녀 아이 둘이 순교자의 건강한 누드를 폰카에 담습니다
조리 갯값이 지원진 나의 눈은 그녀들을 담습니다

같은 시각 여기에서, 또 저기에서 발견되는 숨은 신은 이름이 없으니
그녀들과 나를 그냥 햇빛 사원의 이교도라 불러 봅니다
바람이 도망가는 숨은 산책자의 손지갑에서 더위가 쏟아집니다

(류인서 ‘도상(圖像)’)

여행길일까, 아니면 마실을 다녀오는 길일까, 아무튼 시인은 성당이 있는 길을 가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성화를 팔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성화 속에 담겨 있는 성인들의 나체화는 왜 하나같이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을까, 길 가던 처녀들의 시선을 집중 받는 것은 물론 폰카에 담기가 바쁘다. 그리고 나체화를 찍고 있는 처녀들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음에 중년 여성의 입장인 시인은 당황하고 놀란 눈(조리 갯값이 지원진 눈)으로 처녀들을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마리 로랑생이라는 화가와 서로 연인이 되어서 정열적인 사랑을 나눈 바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기욤의 시에는 세속적인 사랑과 관련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참고로 여기서 ‘백열의 사랑’은 기욤의 사랑처럼 세속적이고 정열적인 내용을 의미한다.

성화의 누드가 순교의 차원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길 가던 처녀들이 반할 정도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성속(聖俗)의 입장보다 세속(世俗)의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는 의미로, 이것은 인간의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 역시 비록 중년이기는 하지만 여인이기에 당연히 세속적인 미에 더 집착하는 처녀들과 한 부류였겠지만, 드러내놓고 좋아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입장이기에 놀란 눈으로 처녀들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처녀들이나 시인은 수호성인들이 추구하는 종교에 동조하는 것보다는 남성의 아름다운 육신을 좋아하는 것이요, 종교인의 입장에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해당 종교인의 측면에서 볼 때 이교도(異敎徒)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언젠가 캄보디아의 사원 벽에 새겨진 조형물들을 본 적이 있다. 종교화라고 하기에 너무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조각을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아마 시인도 그런 입장이었으리라. 기실 종교인의 경건한 입장에서 친견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과 다름이 없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중년인 시인이지만 그녀 또한 여인이며 그 여인의 처지에서 아름다운 남자의 몸을 만난 것이니 그림을 사면서도 괜히 더위 탓으로 돌리면서 뜨거워진 손으로 바람이 지나가듯 누가 볼세라 얼른 성화의 값을 치른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세속적 사랑을 ‘백열의 사랑’이라는 시어를 동원함으로써, 시적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유인서 시인의 시는 모던(modern)하여 젊은 시인들 못지않게 밀도가 높고 격식에 짜임새가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쉬운 듯 하면서도 몇 번이고 생각해 봐야만 이해가 될 수 있을 정도다. 소개된 시 역시 길가에서 성화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사건의 전모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시적 언어를 동원하여 심도 있고 품격 있게 창작된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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