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천년을 하루처럼 울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천년을 하루처럼 울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15 14:4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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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천년을 하루처럼 울다

기어들어 간 애벌레 한 마리
그 쬐그만 입으로
시간의 비단실을 삼킨다

애벌레는 시간이 소멸한 지점에서
신비스러운 종소릴 낸다

애벌레 눈을 감고 죽은 후
투명한 날개를 달고 에밀레종 안으로
숨어들어 천년을 하루처럼 울다

파아란 하늘 끝 허공에
창이 큰 집 한 채 지었음을
누가 알았을까?

(김혜영, ‘둥그런 해바라기 시계 안으로’)

화초를 좋아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는 김혜영 시인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데, 특히 사석에서 나혜석을 사랑한다고 공언을 하고 있다. 김혜영 시인에 대해서 장황하게 사설을 널어놓는 것은 ‘둥그런 해바라기 시계 안으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보잘것없는 애벌레, 그것도 한 마리 그것은 주변에서 크게 주목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놈이 입에서 실을 토해내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아 마치 스스로 시간을 멈춰버린 듯 오랫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러한 서술은 막연히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다음 단계인 환생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상징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환생의 시기가 다가오자 알람을 설정해 놓은 듯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비한 종소리가 울리고 애벌레는 사라지고 천사의 날개를 단 나비가 환생한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나비의 일생 또한 길지 않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듯 젊음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 한 계절이 지나면 나비 또한 생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세상사이다. 그것은 애벌레에서 나비로 환생하여 종탑 부근에서 살아가다가 다음 단계로의 환생이 시작될 종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는 의미도 담겨있음을 상징화시키고 있음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든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해서 자신이 태어났음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상정(常情)일 것이다, 나비 역시 자신의 DNA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고, 그 흔적의 흔적이 그가 애벌레에서 나비로 환생 되는 그 기간 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던 허물, 그러니까 애벌레에서 나비로 탈바꿈되면서 빠져나온 큰문이 달린 집이라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한 계절이 지나면 사라질 나비 역시 다른 형태로 흔적이 남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김혜영 시인의 ‘둥그런 해바라기 시계 안으로’는 앞서 언급했듯 꽃을 사랑하는 시인이 나비라는 우아한 존재를 부각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페미니즘(feminism)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나비(여성인 꽃의 상대인 남성의 상징)를 우아하게 포장함으로써 남성을 여성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비교적 여성 중심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일이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환생을 통해 삶과 죽음 혹은, 죽음 너머에 있는 내세사상을 표출한 점은 은근히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回) 사상으로 결부시킬 수 있으니, 곧 추(애벌레)에서 미(나비)로 진화하는 미적 존재로 환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생명(영혼)의 영속성 혹은 불멸성을 동시에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둥그런 해바라기 시계 안으로’는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점이 선입견이 되어 자칫 동양사상 특히 불교의 내세관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면서, 서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페미니즘 사상을 존중하는 시인의 인생관을 이해하기 좋은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둥그런 해바라기 시계 안으로’는 비교적 짧은 시이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메타포(metaphor)가 많이 함축되어 있어서 독자들이 탄성을 낼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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