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얼굴이 오고 있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얼굴이 오고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20 14:3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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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얼굴이 오고 있다

저녁에 돌아오는 얼굴은 순하다

희망이 그린 지도에서 길을 헤매다
갈기 헝클어진 사자이거나
오를 수 없는 킬리만자로를 바라보는 초원의 기린이거나

때로는 이빨을 때로는 눈빛을 숨기고
차마 뱉지 못한 말들과 찢어진 입으로 웃어야 하는 광대처럼
천둥같은 오후를 보낸
인욕의 주름 하나 더 새겨지는 이마

저기, 어둠 속에서도 명징하게 울리는 굽 닳은 구두 소리와 휴전의 그림자를 끌며
저녁
얼굴이 오고 있다.

(이서린, ‘저녁의 얼굴’)

이서린 시인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지역에서 살고 있어서 여러 번의 면식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시 작품을 보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곳곳에 치열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다. 평소 시인은 명랑한 얼굴이지만,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도 곳곳에 그녀 혼자서만 감당해야만 하는 그녀만의 치열한 삶의 이력이 자주 엿보인다.

이번 시에서도 저녁이나 찢어진 웃음, 인욕 등의 어휘 속에서 그러한 삶의 이야기가 많이 묻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평소 나는 한 번도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서글서글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아름다움이 내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므로 치열한 삶의 흔적을 보일 때는 그렇게 보여야 하겠지만, 그 상황이 끝나면 당연히 하루를 그렇게 살아 온 그녀에게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위로하고 당당해지려는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과 함께 여성으로서의 자태로도 함께 돌아올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저녁에 돌아오는 얼굴’은 순하다고 시의 첫머리에 장식한 대명제에서 이미 시의 결론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평소 시인의 그러한 생활에서 묻어나오는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루가 시작될 때쯤이면 희망을 품고 일과(日課)를 시작해 보지만 삶의 곳곳에는 복병(伏兵)처럼 녹록치 않은 일상이 숨어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러한 복병을 정복하고 돌아오면서 비록 육신은 지쳐있지만, 내면적으로 성취감이랄까 그러한 것을 품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희망을 그렸지만, 뜻하지 않게 사자의 갈퀴처럼 위엄을 보여야 할 경우나 기린의 목처럼 길게 뻗어 희망의 목적지를 확인하면서 피로를 풀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환경에 따라 이빨이나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생활은 //천둥 같은 오후를 보낸// 것처럼 격정적인 하루를 보내면서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순한 얼굴에 좌절의 모습도 비친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인욕의 주름 하나 더 새겨지는 이마// 라고 노래했듯 모두 인생의 경륜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는 차원 높은 인식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욕(忍辱)이란 불교 용어로,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번뇌 등을 참는 수행 방법의 하나로 이 세상의 온갖 모욕과 고통과 번뇌를 참으며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이마의 주름은 삶의 과정에서 겪어온 세상의 번뇌를 추슬러온 삶의 경륜으로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번뇌를 감내하면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인의 얼굴에서 이미 순한 얼굴이 된다는 것. 삶의 경륜이라는 것이 이렇게 인욕의 과정을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저녁에 돌아오는 얼굴이 아닐까.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명징하게 굽이 닳은 구두 소리를 내면서 순한 얼굴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하루의 긴장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다. 시에서 말했듯 ‘휴전의 그림자를 끌’듯 내일의 삶에 대한 긴장은 잠시 접어둔 상태로 되어있다. 시인이 말하는 삶이란 욕망과 좌절과 인욕의 연속이고 그 연속된 삶의 과정에서 경륜이 갖춰지는 치열한 삶이요, 그것이 시로 승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비록 짧은 시이기는 하지만, 긴 산문 못지않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면서 진정한 삶의 경륜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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