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내일의 식탁보 같은 하얀색
시와 함께하는 세상-내일의 식탁보 같은 하얀색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9.29 17:3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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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내일의 식탁보 같은 하얀색

나는 지운다 나를

기계적으로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구름

흩어지기 위해서만 모이는
얼음 방울들의 차가움에 가까워지도록

인간의 울음이 발명된 후로
나의 수요일은 다가올 수요일들을 위해
복제된다 마음이
남아 있다는 말

하나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손자국이 포개진다는 이야기

오늘의 식탁 위에 다시 차려지는
내일의 식탁보 같은 하얀색
백지 위 타이프 라이트가 지나간 자리
남아 있는 소리들

위로 형성되는

(하재연의 ‘드로잉’)

하재연 시인의 시는 다소 난해한 시가 많은데 이 시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시다.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부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천천히 꼼꼼하게 내용을 살펴보면 또한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드로잉은 최근 연필이나 볼펜을 가지고 정물화나 인물화 따위를 그리는 그림으로 젊은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장르이다. 연필로 그릴 적에는 쉽게 지웠다 다시 그릴 수 있지만, 볼펜으로 그리면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이 아니면 그리기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여기서는 연필로 자화상을 그리면서 지웠다 다시 그리는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점차 마치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작은 방울들이 흘러 흘러 큰 물방울이 되듯 작은 점과 선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역사 이래로(인간의 울음이 발명된 후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나 종교적인 상징성으로 인해 그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지만, 뜬금없는 것은 /나의 수요일은 다가올 수요일들을 위해/라는 언어의 등장이다. 수요일이 왜 거기서 나와? 그것의 이해를 위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약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사순절(四旬節)에 참회자들은 베옷을 입고 종려나무 잎을 태운 재를 머리에 뿌리며 참회의 시기를 알렸음에서 비롯된 ‘재의 수요일’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후에 예배자들은 그 종려나무 잎사귀를 태운 재로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 방법으로 ‘재의 수요일’을 대신 지켜갔다.

그러니까 시인이 말하는 수요일은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듯 드로잉 하는 날을 의미하며 그렇게 드로잉이 완성되어 나는 복제(초상화를 그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이 여러 번 지나간 자리는 당연히 점과 선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드로잉이 완성되어 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드로잉의 과정을 그림이 아닌 글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식탁보 같은 하얀 스케치북 위에서 탄생하는 그림의 과정을 글로 표현해야 하므로 타이프 라이트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글(시)로 드로잉을 해야 되는 것이다. 글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란 생각이나 사상을 그리는 행위로 문학 활동을 하는 일종의 시 창작활동을 의미하리라. 그러니까 시인의 드로잉 작업은 언제나 시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도 사실은 예술의 한 장르로 볼 수 있으며, 다수의 예술은 눈과 귀를 통해서 활동이 완성되지만, 글 예술은 상상과 사상을 통해서 형성되는 예술이다. 그렇게 볼 때 글 예술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하재연 시인의 시는 대부분 이른바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난해시(難解詩) 형태이다. 다소 어려운 면이 없지 않지만 비슷한 내용의 시를 여러 번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뜻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가끔 시인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여러 번 연습을 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 독자와 작가의 의도가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시를 감상할 때는 제목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으며 제목을 기준으로 삼아서 해석하면 제일 빠른 이해의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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