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의 뿌리를 찾아서]④고령 지산동 고분군
[가야문화의 뿌리를 찾아서]④고령 지산동 고분군
  • 배병일기자
  • 승인 2022.12.26 17:00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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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맹주 대가야의 역사 문화 보여주는 산증인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전경.

수년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꿈꾸던 가야고분군이 마침내 세계유산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올해 6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면서 차질이 빚어졌다. 등재와 관련한 각종 사업을 준비하던 지자체와 단체들은 막연한 기다림에 답답한 상황이다. 본지는 가야고분군 세계등재를 기원하던 독자들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지면으로나마 고분군을 만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대가야 기원후 42년 건국 신라 병합까지 520년간 존속
금관가야 쇠퇴 후 5세기부터 성장 후기 가야사회 주도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함께 진정성과 완전성 인정받아


경북 고령군 지산동에는 크고 작은 가야시대의 고분군들이 수백기 남아 있다. 고령읍을 둘러싼 해발 310m의 산등성이 위에는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주산성이 있다. 이 산성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주능선 하나와 그에서 읍내 쪽으로 뻗어 내린 가지능선 위에는 많은 수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산동 고분군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봉토분은 706기에 이른다.

32호분에서 가야 최초의 금동관이 출토됐으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79호로 지정됐다. 이곳 고분군에서는 놀라운 유물들이 발견됐다. 이러한 무덤으로 보아 고령가야가 가야의 맹주국, 즉 대가야였던 것이 입증된다.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함께 그 진정성과 완전성을 인정받아 2013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지금은 세계 문화유산 본 등재를 앞두고 있다.

대가야는 기원후 42년 시조 이진아시왕이 나라를 열어 562년 신라에 멸망하는 도설지왕대까지 520년간 존속했다고 전해진다. 대가야는 전기 가야사회를 주도했던 금관가야가 쇠퇴한 이후인 5세기부터 크게 성장해 후기 가야사회를 주도했다.

지산동고분군의 유물 문화는 그 지역 일대에 일원적으로 확산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합천 옥전·번계제고분군, 산청 중촌리고분군, 함양 산백리·백천리 고분군, 남원 월산리 고분군, 장수 삼고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 이후의 유물들의 유사성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6세기 전반에는 고령계 유물 문화의 전파가 더욱 심화되어 진주 수정봉·옥봉고분군, 고성 율대리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에까지 고령계 토기가 확산됐다. 그러면서도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질과 양의 측면에서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어 해당시기에 고령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이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갖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고대국가 형성기 대가야 사회 지배층의 공동묘지이다. 왕과 귀족이 이승과 저승은 별개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라는 내세관을 토대로 자신들의 무덤을 생시에 살았던 도읍 내 취락 및 평지가 바라다 보이는 인접 구릉에 집단적으로 축조한 유적이다. 이로써 이 고분군이 소재한 구릉 전체는 바로 대가야 왕과 귀족의 내세공간이 됐다. 그리하여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 지배층이 고대국가 초기의 아주 독특한 내세관과 그에 따른 장의문화를 자연경관에 맞추어 실현했음을 말해주는 유례를 보기 드문 유적이다.


둘째, 고대국가 형성기 대가야 지배층이 지산동고분군에 무덤을 축조하면서 자신들의 혈통적·정치사회적 정체성을 표현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조직적 특성이 응축되어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셋째, 지산동고분군의 무덤 축조에는 자연적·문화적 경관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당시 개발된 뛰어난 토목기술을 적용했다. 대가야의 지배층이 살았던 때의 거주지와 방어시설, 그리고 사후의 공동묘지를 일정한 장소 안에 배치해 형성된 독특한 자연친화적 문화경관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

지산동고분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에서는 ‘현의 서쪽 2리 남짓 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간에서 금림왕릉이라고 일컫는다’라고 대가야왕릉으로서의 지산동고분을 기록했다.

지산동고분군은 지금까지의 발굴과 연구 성과로 보면 대략 4세기 말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까지 조성됐다. 이 시기는 정식 국명을 가라(加羅)라고 했던 대가야가 본격적으로 국가 형성을 시작해 5세기 후반에 고대국가로 변모한 후 562년 최종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고령에 중심을 둔 가라국은 5세기 전반 말에 서쪽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북부, 남원 운봉을 거쳐 장수지역까지를 거느린 연맹의 맹주국으로 성장했고 5세기 후반에는 점차그 지역들을 지방으로서 지배해 나가면서 영역국가로 변모했으며 늦어도 5세기 말에는 그 세력을 섬진강 하구의 하동과 순천 등지까지 확대하는 등 고대국가로서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계속했다.

지산동고분군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에 단지 고령 지역 대가야의 중심 고분군에 그치지 않고 호남 동부까지 세력을 떨치고 가야 지역 태반을 넘는 북부 및 서부를 호령한 대가야 국가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다.

지산동고분군이 대가야 국가를 배경으로 축조된 점은 출토되는 토기와 똑같은 고령산 토기 및 동일 양식 토기들과 대가야식금제 귀걸이가 그 영역 내 지방 각지의 고총군에서 출토되는 사실로 미루어 알수 있다. 그런 귀걸이는 왕도 고령의 지배층이 지방 각지 수장층의 생전에 그 지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하사한 것이며, 또 고령산 토기들은 그들의 장례에 즈음해 정치적 조문을 하면서 보낸 선물의 성격을 띤 것이다. 이런 유물들이 선물이었다는 점은 그것들에 대한 답례의 형식으로 막대한 양의 식량 등 공납물이 고령 지역에 보내졌음을 뜻한다. 그래서 지산동고분군은 궁극적으로는 대가야 국가 영역 내 각지의 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조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가야 시대의 갑옷.
대가야 시대의 갑옷.

지산동고분군의 주된 무덤양식은 구덩식돌덧널무덤이며 늦은시기의 일부 무덤은 앞트기식돌방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이며 봉토분은 704기에 달한다. 지름을 기준으로 크기에 따라 고총을 나누어 보면 40m 이상 1기, 40~30m 5기, 30~25m 6기, 25~20m 6기, 20~15m 18기, 15~10m 87기, 10m 미만 581기이다. 이렇게 볼때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영역 안은 물론이거니와 가야 전역에서도 최대 규모와 숫자를 자랑하는 고분군이다.

그 외에 원래 봉분이 없거나 남지 않은 소형 돌덧널무덤 등을 포함한다면 전체 고분의 수는 수만 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무덤들에서는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각종 철기, 말갖춤을 비롯해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장신구가 출토됐다. 지산동고분군이 자리 잡은 공간은 대가야의 왕을 비롯한 왕족 및 귀족 등 지배층 사람들이 묻힌 망자 전용의 공간으로서 신성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는 주체적 기록을 남기지 못했으며, 신라에 패망한 뒤 역사의 패자로서 그 역사가 철저히 지워졌다. 하지만 대가야는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한 각종 유산들이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와 국가로서의 위용을 전해주고 있다. 대가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지산동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대가야의 찬란한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배병일기자
자료·사진제공/고령군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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