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의 뿌리를 찾아서]⑤함안 말이산 고분군
[가야문화의 뿌리를 찾아서]⑤함안 말이산 고분군
  • 배병일기자
  • 승인 2022.12.29 16:54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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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 아라가야 지배층 문화 확인 가능
▲ 함안 말이산 고분군 전경.

수년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꿈꾸던 가야고분군이 마침내 세계유산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올해 6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면서 차질이 빚어졌다. 등재와 관련한 각종 사업을 준비하던 지자체와 단체들은 막연한 기다림에 답답한 상황이다. 본지는 가야고분군 세계등재를 기원하던 독자들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지면으로나마 고분군을 만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5세기까지 전성기…6세기 중반 신라 복속
가야국들 대표 백제 등과 외교활동 주도
우수한 토기철기 기술 독자적 문화 구축
고분면적 80만㎡ 국내 최대급 규모 자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박차


함안은 경상남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남쪽은 낙남정맥이 지나감으로써 여항산 등의 높은 산지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이 서로 만나 낮은 지대를 이룸으로써 남고북저의 특징적인 지형을 하고 있다.

2000년 전엔 중국 역사책에 등장할 정도의 나라, 안야국을 형성했고, 점차 성장하여 1700년 전에는 아라가야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되어 삼국과 당당히 겨루어 나갔음을 함안의 많은 고대 유적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나 ‘일본서기’에 극히 부분적으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가야가 6세기까지 신라 백제 등과 대등한 입장에서 성장을 계속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왜국의 역사와 관련되는 부분만이 다뤄져 마치 삼국에 부수하는 역사로 취급돼 왔다.

함안은 아라가야, 안야, 아라, 아시랑국, 안라인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아라가야의 옛 지명이거나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기원을 전후한 변한의 작은 나라였을 때부터 신라에 멸망하기 까지 약 500년 동안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안야국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해 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로, 상당한 수준의 정치 문화적 발전을 이루어 냄으로써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와 함께 가야의 맹주국으로서 활약했다.

4세기를 전후하여 성립한 아라가야는 5세기 무렵에는 말이산의 대고분들을 조성할 정도로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후 여러 가야국들을 대표하여 백제, 신라, 일본 등과의 외교 활동도 주도하기에 이른다.

강력한 국가였던 아라가야. 우수한 토기와 철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구축한 독자적인 문화는 고대 한반도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과 치열하게 경쟁해 나갔던 아라가야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세계문화유산 전문가 말이산 고분군 발굴 현장.
세계문화유산 전문가 말이산 고분군 발굴 현장.

선사시대 문화를 토대로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신라에 멸망하는 6세기 중엽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아라가야가 성립된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로,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진주, 의령의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광활한 분지와 넓은 해안을 영토로 했다. 가야 전기에는 금관가여, 후기에는 대가야와 함께 전기와 후기를 통틀어 여러 가야국을 이끌었다.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이, 남쪽에는 진동만이 있어 내륙과 해상으로 진출하기 유리했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아라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아라가야는 5세기 후반 삼국시대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누렸다.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신주를 설치함으로써 554년에는 백제와의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한 뒤 큰 장애물 없이 가야로 진출했다. 결국 6세기 중반 아라가야는 신라에 복속되고 만다.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 고분군으로, 아라가야의 5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함안의 대표적인 고대 유적이다.

‘우두머리’ 즉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을 의미하는 말이산은 가야분지에 위치한 해발 40~70m의나지막한 구릉으로, 이 산의 중심과 가지능선에는 가야시대 고분이 빼곡히 분포해 있는데, 그 면적이약 52만㎡나 되어 국내 최대급의 규모를 자랑한다.

말이산고분군의 대형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형태가 잘 남아 있는 37기의 고분을 지정·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 적지 않아 약 1000기 이상의 가야 고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도기 일괄.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도기 일괄.

말이산고분군에 대한 기록은 선조 20년(1587) ‘함주지’에서 확인된다. 아라가야가 멸망하고 1000여 년이 지나도록 말이산고분군이 가야 왕릉이라는 인식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장점기 말이산고분군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수난을 겪게 된다. 1914년 말이산 1호분을 시작으로 4호분, 25호분, 13호분, 12호분이 발굴됐지만 역사성 규명 보다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을 선전하는 것과 유물 수집에 치중되어 가야사 규명을 위한 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망실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제정(1933)하고 행정 구역에 따라 말이산고분군을 조적 제118호 도항리고분군과 제119호 말산리고분군으로 분리지정(1940)한다.

한국전쟁 이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1962)됨에 따라 말이산고분군은 사적 제84호 도항리고분군과 제85호 말산리고분군으로 지정(1963)됐다.

이후 가야문화권 학술조사(1981)와 가야문화권 정밀조사(1982)를 거쳐 가야문화권 중요유적에 대한 학술조사 및 보존사업(1992~1996)을 계기로 말이산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연구와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30여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 만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됐다.

최근 고분군의 원래 이름인 ‘말이산’을 되찾자는 지역민의 뜻을 모야 행정구역에 따라 분리지정된 두 고분군을 말이산고분군으로 통합하여 사적 제515호로 재지정(2011)됐고, 같은 유적으로 인식한 ‘함주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던 ‘남문외고분군’을 말이산고분군으로 확대지정(2021)하여 지금의 규모를 가지게 됐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이 안치된 나무널을 묻는 무덤으로 영남지역에서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널리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널무덤은 구릉의 경사면 아래나 평지에 만들며 그 규모는 구덩이 크기를 기준으로 길이 3m 내외, 폭 1m 정도이다. 널(棺)은 통나무나 판재를 사용하였다. 널 속에는 구슬, 팔찌, 부채 등을 넣고 토기, 철기, 칠기 등은 널 밖에 둔다.

불꽃무늬 토기.
불꽃무늬 토기.

덧널무덤은 나무널과 껴묻거리를 보호하는 덧널을 설치한 무덤으로, 넓은 구덩이를 판 후 바닥을 고르고 점토를 바른 후 자갈돌은 1~2겹 골고루 쌓아 바닥 시설(시상)을 만들었고, 중앙에 관이 놓이는 자리는 자갈돌을 2~3겹 더 쌓았다. 널과 덧널의 사이공간에 유물을 놓았으며, 널무덤에 비해 껴묻거리의 종류와 수량이 많다. 구덩이와 덧널 사이는 점토와 흙으로 채워 덧널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으며, 판재로 덧널을 덮고 점토로 틈을 메워 밀봉한 후 봉문을 만들었다.

5세기 중엽 대형봉토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는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대형화된 봉분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덧널을 돌덧널과 덮개돌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말이산고분군의 대형봉토분은 대부분 이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아라가야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독창적인 특징이 있다.

아라가야 구덩식돌덧널무덤의 내부는 모두 3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무덤 주인의 공간을 중심으로 머리 위쪽에는 껴묻거리를 두는 유물부장공간이, 발 아래에는 순장자 공간이 위치한다.

굴식돌방무덤은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아 무덤방(玄室)을 마련한 지상식 구조의 무덤으로, 한쪽 벽면에 통로인 널길을 만들어 놓아 시신을 추가로 매장할 수 있는 무덤이다.

아라가야 굴식돌방무덤은 서말이산(남문외고분군)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굴식돌방무덤의 수용과 더불어 아라가야의 중심 묘역이 동말이산에서 서말이산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준다.

말이산고분군은 김해 대성동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과 함께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봉황장식 금동관.
봉황장식 금동관.

2012년 4월, 잃어버린 가야 문명의 흔적들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 현재 한창 진행 중이다.

말이산고분군은 국내 전문가들의 심사를 통해 가야고분군이 ‘잠정목록 신청 후보’로 선정됐고, 이어 2013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 회의에서는 가야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또한 2015년 3월 대한민국 문화재청으로부터 김해 대성동고분군(금관가야 왕릉), 고령 지산동고분군(대가야 왕릉)과 함께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 우선 등재대상’으로 선정됐다.

1500년 전 아라가야의 역사를 품고 있는 말이산고분군이 하루 빨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기를 기원하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가야 유산.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유산으로 우뚝 설 날을 기대해 본다. 배병일기자·사진/함안군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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